김살로메. 제 필명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름에 관심을 보입니다. 특이한 이름이네요,라며 호기심을 보이거나 세례명이죠,라고 눈치 빠르게 되묻곤 합니다. 호의적인 그들은 눈빛으로 ‘진짜 이름은 뭐예요?’라고 말합니다. 눈치껏 진짜 이름을 말하는 순간, 빵 터지는 웃음소리.

세례를 받던 스무 살 즈음, ‘살로메’라는 세례명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좋아하던 작가 루 살로메를 차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성녀 살로메와 루 살로메, 중의적 의미의 그 이름은 그렇게 제 곁으로 왔습니다. 세례명은 자연스레 필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치기 서린 시절의 선택이었지만 제법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문단 원로분께서 필명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셨습니다. 이름이 곧 사람인데,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악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나요. 루 살로메에 경도되었던 젊은 날이었기에 거기까지 살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다른 이름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듯한 느낌의 이 필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요.

제 진짜 이름은 ‘김복남’입니다. 1960년대산 산골 이름 치고도 촌스러움이 더합니다. 그 시대 여자이름에 흔하게 붙는 ‘자’자 돌림이 상대적으로 세련되어 보일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이름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 두 곡이 놀림의 선전곡이 되곤 했습니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꽁당 보리밥, 꿀보다도 더 맛 좋은 꽁당 보리밥.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남자애들은 제 눈만 마주쳐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무 싫었습니다. 당시 월간지인 ‘어깨동무’나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를 펼치면 서울우유 광고가 나왔습니다. 단란한 네 식구가 식탁에 앉아 토스트에 흰 우유를 곁들여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도회지 사람들의 이런 아침 풍경을 꿈꾸던 저에게 꽁당보리밥 놀림곡은 현실을 깨우는 조리돌림 같은 수치심을 안겨주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 2탄이 장전되곤 했으니까요. ‘복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복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복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모두 다 찾아가서 위로합시다.’ 2절까지 무려 ‘복남이’이란 이름이 여섯 번이나 들어가는, 제게는 공포이자 폭력 같은 놀림이었지요. 확인 사살하듯 ‘콜록’ 또는 ‘에취’라는 감탄사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남자애들의 뒤통수라도 갈기고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이름에서 자유로워진 건 아닙니다. 분주한 한 모임에서였습니다. 무슨 이유로(아마는 좋은 이유였을 거예요!) 제 필명인 ‘김살로메’가 불렸습니다. 순간 제가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모른, 앞자리의 남자분 둘이 귀엣말을 했습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들의 뒷모습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살로메 진짜 이름이 뭔지 알아?’, ‘알고 말고. 김복남!’ 이런 대화들이 오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진 이야기는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 김봉남 선생에 관한 것이었을 테고, 어쩌면 ‘꽁당 보리밥’ 노래까지 들먹였을지도 모릅니다. 마주보며 키득거리기까지 했으니까요. 아무 잘못 없는 그들에게 욱,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 상상력의 범위가 너무 나간 것이지요. 저도 모르게 어린시절이 오버랩 되어 떠오른 모양입니다.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철든 이후 제 이름을 불편해하거나 불명예스럽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개명하기 좋은 요즘 세상, 얼른 법원으로 뛰어갔겠지요. 제 이름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고,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유머로 삼을 만큼 연륜도 생겼습니다. 자연인 김복남은 김복남이고, 쓰는 자로서 김살로메는 김살로메일 뿐이니까요.

재미로 들른 철학관에서 제 이름이 좋지 않답니다. 앉은 자리에서 삼십 만원을 내고 개명할 이름을 받아 가랍니다. 물론 ‘그 돈으로 쇠고기나 사 묵지.’ 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습니다. 이름으로 인해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고 큰 소리 치면서도 필명을 쓰는 데는 소심하나마 변명이 있습니다.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만으로 제 연배를 가늠하는 걸 피하고 싶었습니다. 본명 그대로를 필명으로 삼을 경우, 첫 독자라도 제 연식(?)을 금세 눈치 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글의 성격과는 상관없이 늙은 글로 읽힐 수 있습니다. 나이 따라 글이 늙는 건 당연한데 괜한 몽니를 부리는 것이지요. 미완의 글쟁이로서 가야 할 길이 먼 만큼, 제 이름이 지닌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아직은 스스로를 보호하고픈 마음이 있나 봅니다.

어떤 이름이 스스로를 대변한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실명이냐, 필명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두 이름 다 스스로 보듬어야 할 제 이름일 뿐입니다. 이름자에 꽃잎을 달고 열매를 맺는 이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니까요. 새벽 창을 엽니다. 오늘도 스스로를 위한 발자국, 한 발 한 발 내딛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