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에 출판된 필립 K. 딕 초반본 책의 표지.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오직 인간만으로 이뤄진 사회에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특별한 자질들이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러니 오히려 인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체감하기는 어렵다. 특별히 그것이 어떤 것인가 규정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다움에 대해 물어야 하는 순간은 늘 어떤 계기를 통해 찾아온다. 인간이었음에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이들의 자기 호소를 발견하는 때가 그러하다. 전쟁 같은 완전한 탈인간성의 시대에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행위들에 대한 규정을 통해 역으로 ‘인간다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피해를 받은 인간의 절망에 가까운 호소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이른바 휴머니즘의 기원이다.

우리가 인간다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두 번째 순간은, 주로 인간 능력의 연장으로만 간주되던 ‘도구’들이 하나의 자기 존재로서 눈앞에 드러나는 때에 도래한다. 최근 A.I와 로봇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인간은 어쩌면 지금까지는 도구로만 간주해왔던 컴퓨터가 하나의 존재로서 자기 주장을 하려는 순간을 마주하게 됐다.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 또 다른 사회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이 순간을 통해 본격적으로 ‘인간다움’에 대해 물어야 하는 가장 치명적인 계기를 마주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중에 A.I나 로봇이 대신하겠지, 라는 자조 섞인 말들은 바로 컴퓨터라는 도구가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인간다움’에 균열을 낼지 모른다는 공포와 관련돼 있다.

미국의 가장 뛰어난 SF작가인 필립 K. 딕(The Philip K. Dick·1928~1982)은 이미 1968에 쓴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속에서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안드로이드가 도래한 세계에 대한 공포를 제시했다. 핵전쟁이후 지구가 몰락하면서 방사능 오염으로 살아있는 동물들이 거의 멸종되고 난 시대에 주인공인 릭 데커드는 화성에서 탈출한 안드로이드를 사냥해서 그들을 퇴역시키는 직업을 갖고 살아가며, 현상금을 모아 자신이 갖고 있는 ‘전기양’ 대신에 살아 있는 ‘진짜 양’을 갖고 싶어한다.

이 소설을 통해 필립 K. 딕은 바로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한다. 작가의 답은 비교적 명확하다. 주인공 릭 데커드가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소설 속의 검사법 중 하나인 ‘보이트-캄프 테스트’는 다름 아니라 감정이입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테스트였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안드로이드인지 모르는 레이첼을 검사하면서 바로 감정이입 유무를 평가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자신의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인간다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남기며 이 작품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 즉 어떤 대상이 갖고 있는 감정 속으로 들어가 그 감정을 자기화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간다움에 대한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물론 강아지나 고양이도 어느 정도는 감정적인 동조가 가능하지만, 인간은 좀 더 고차원의 감정이입이 가능한 동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가 갖는 인간다움에 대한 규정이나 집착은 다름 아니라 인식적 폭력은 아닐 것인가. 마치 유색인종과 섞이게 된 백인들이 자신의 백인다움을 규정하고자 애썼던 제국주의 시대의 교훈처럼, 인간다움에 대한 필사적이고 우악스러운 규정 속에는 대상에 대한 어떤 공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그것에 뒤쳐져 인간됨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이다.

A.I가 상용화되고,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화성 진출을 시작한 중요한 변화의 시대에, 출판된지 벌써 50년이 넘은 이 소설은 디지털 우리가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인간다움’에 대한 태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