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헛담이 먼저 반긴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우리는 처음부터 담장이 익숙했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햇볕이 따뜻하게 데워 놓은 담장에 기대 놀았고, 친구와 담 밑에서 숨바꼭질하며 키를 늘였고, 부지깽이를 든 엄마에게 쫓겨 줄달음치다가 잠시 흙담 모퉁이에서 가쁜 숨을 고르기도 했다. 담장은 골목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청송 덕천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햇살에 바랜 흙담이 맨 앞에 서서 구경꾼들을 안내한다. 홍살을 단 솟을대문을 슬며시 밀자 ‘꿔이익’ 닭 울음 닮은 소리를 낸다. 근방에 송소고택만큼 품 넓은 집이 없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다. 아흔아홉 칸 기와집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렸다는 심호택이 1880년경 호박골에서 본래 살던 덕천리로 이전하면서 지어졌다.

너른 마당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헛담이 우릴 반겼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외출이 잣지 않던 여인들이 뭇 남정네가 앉아 있는 앞을 지나 안채로 가는 게 상당히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아녀자를 배려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내외벽인데, 바깥주인이 머무는 사랑채에서는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짝 가려 보이지 않게 했다. 병풍을 두르듯, 가리개를 세운 듯 ‘ㄴ’ 자 모양으로 돌아앉은 모습이 수줍은 새색시 같다.

이집에는 담이 유독 많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높은 담이 행랑채를 끼고 집 전체를 휘감았고, 남자는 사랑채에 여인네들은 안채에 따로 살게 나누는 흙담이 있고 노소 또한 구분해 놓았다. 남자아이는 일곱 살이면 어미가 사는 안채에서 나와 아버지가 기거하는 작은사랑채와 할아버지 슬하인 큰사랑채에서 글을 배워야 했다. 여자아이는 별채를 따로 두고 신부수업을 시켰다. 별채 담장에 달린 문이 특이하다. 보통의 대문이 집안으로 열리는데 비해 이 대문은 밖에서 잠그고 열 수 있게 설계했다. 시집가기 전에 그 담장 밖으로 함부로 나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조선의 여성들이 풍성한 치마아래 고쟁이에 속속곳까지 여러 겹의 속옷을 받쳐 입었듯, 이 고택의 솟을대문에서 안방까지 가기 위해서는 여러 문을 거쳐야 한다. 그런 여인에 대한 배려인가, 만석꾼의 여유인가.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담장에 구멍이 뚫려 있다. 사랑채에서 보면 여섯 개의 구멍이고 안채에서 보면 세 개의 구멍이다. 셋이 여섯을 이기는 기적이 이 담장에서 일어난다. 여섯 개의 구멍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지만 안채의 세 개의 구멍으로 들여다보면 망원경처럼 사랑채 마당을 살펴볼 수 있다. 옛날 이곳에 살았던 안주인은 세 개의 구멍으로 비껴서 여섯 개의 구멍 앞을 거니는 사돈댁에 다니러 온 아비의 뒤태를 보고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지척에 친정아비를 두고도 부르지 못하니 고된 시집살이에 대해 넋두리를 담장에게 털어 놓으며 수많은 계절을 보냈을 것이다.

담을 생각해낸 이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서민들 속의 담은 그들과 달랐다. 분명 ‘내’와 ‘네’는 겉모습이 다르지만 써 놓고 읽으면 같은 소리가 난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우리는 내 집 네 집 구분 없이 드나들었다. 울타리 때문에 친구 집에 못 가는 일은 없었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수필가

공간을 나눈 담장이 많아 자칫 답답하게만 느껴질까 봐 송소고택의 주인장은 지혜를 발휘해 흙담에 꽃을 그려 숨통을 터 주었다. 꽃담은 보면 볼수록 소박하고 은근한 맛이 배어난다. 해의 양기와 달의 음기를 불어넣어 꽃을 피우고, 새를 불러들이며, 풍성하게 열려있는 과실을 표현하여 담이 곧 정원이 되었다. 깨진 기와와 돌을 꾹꾹 눌러 박은 소탈한 치장은 조선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설치미술이다. 담장이 긴 이야기책이라면 꽃담은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첩을 닮았다.

고택 마당을 돌아 나오니 어느새 배추흰나비 한마리가 담장에 찾아왔다. 기와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날개로 여름을 접었다 폈다하기를 쉼 없이 반복한다. 오래 간직한 고택 담장에 내가 다녀간 이야기를 한켠에 그려 넣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