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
⑥ 감은사지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감은사터의 모습. 동·서의 삼층석탑 2기는 1962년에 국보 제112호로 지정됐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감은사터의 모습. 동·서의 삼층석탑 2기는 1962년에 국보 제112호로 지정됐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생의 허무와 쓸쓸함이 견딜 수 없는 감정으로 밀어닥치는 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고,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혼자서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싶은 날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럴 때 당신에게 잠시잠깐이나마 위로와 편안함을 선물할 여행지를 알고 있다.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35km쯤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양북면 감은사지(感恩寺址).

지척에서 바다가 출렁이는 이 ‘오래된 절터’는 주요 유물이 출토된 거대한 석탑과 금당(절의 본당)·강당(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학습장)터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청아한 소리로 우는 여러 마리의 새가 몰려드는 감은사지 뒤편 산속. 바람이 일으키는 파동에 따라 술렁이는 대나무와 소나무의 합창은 번잡한 도시에선 경험할 수 없는 평화로움으로 우리를 이끈다.

장마와 폭염을 앞둔 7월 초 한가한 평일 오후. 감은사지를 찾아 2개의 석탑 주위를 찬찬히 돌아보고, 야트막한 산 아래 그늘에 앉아 1천300년 전 신라 사람들의 숨소리를 느껴봤다. 답답하게 막혔던 가슴 한 구석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서라벌의 숨겨진 보물’이라 불러도 좋을 감은사지는 주위 풍경이 기막힐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찰이 있었던 곳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감은사가 세워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동해안에 위치하고 신문왕 2년(682년)에 그의 아버지 문무대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부근 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은 빈번히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호국사찰을 조영하던 중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이 승려 지의(知義)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신문왕은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경주 양북면에 위치한 오래된 절터 ‘감은사지’
2단의 기단 위에 여러 돌로 짜맞춰진 석탑들
중앙 돌계단, 가로·세로 깔아놓은 돌 등 독특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 했던 문무왕
그 아버지를 위해 금당아래 지하공간 만든 신문왕
서쪽 삼층석탑서 발견된 보물 366호 ‘사리장엄구’
동탑서도 빼어난 불교유물 발굴… 예술적 사찰로
대숲·솔숲 향기, 새소리 주위 푸른 절경에도 감탄

◆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었다는 감은사 금당

1950년대 감은사지 일대를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1천년 가까이 지속된 천년왕국 신라. 그중에서도 삼국통일을 이끈 문무왕과 통일왕국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축조한 신문왕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새겨진 그곳에 살던 70년 전 경주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걸 느꼈을까?

자신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공간 옆에 자리한 역사의 현장. 매일 밤마다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됐다는 문무왕과 아버지를 위해 용이 쉴만한 거대한 지하공간을 절 아래 만들었다는 신문왕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을지.

그리고 2020년 오늘. 기자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이어폰을 통해 바그너(Richard Wagner)나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의 장엄한 음악을 들으며 감은사지에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환희와 환멸을 두서없이 떠올린다.

단조롭고 무심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선물 같은 여행지’가 돼준 감은사지. 여기서 본격적인 발굴·조사 작업이 시작된 건 60년 전쯤이다.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1959년 시작한 감은사의 발굴은 우리나라 연구자들에 의한 최초의 사지(寺址) 발굴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3차에 걸친 발굴과 조사를 통해 유물을 수습하고 사지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남아시아 힌두사원이나 페르시아 이슬람 유적처럼 입이 딱 벌어질만한 웅장한 규모도 아닌 감은사지. 하지만, 석탑을 포함한 유적·유물의 미학적 완성도는 다른 어떤 사찰에서 발견된 것들보다 높다는 게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2개의 탑이 마주 선 사찰인 감은사는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됐다는 것,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중회랑을 두었다는 것 등이 특이한 점이다. 2층으로 기단을 쌓고 기단의 각 면 중앙에 돌계단을 놓은 감은사지 금당은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지면과 건물 사이에 꽤나 높고 넓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는 것.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건축 양식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비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흥미롭다.
 

 

우리나라 석탑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는 삼층석탑의 모습.  /경북매일 DB
우리나라 석탑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는 삼층석탑의 모습. /경북매일 DB

◆ 호국사찰인 동시에 예술적 사찰이었던 감은사

지인의 자동차를 타고 화장된 문무왕의 뼈가 묻혔다는 봉길리 앞바다 수중릉을 만나고, 감은사지를 돌아보던 날. 인적 드문 그곳에서 1천300년 전 신라를 상상했다. 아버지의 애국심과 아들의 효심이 만들어낸 14세기 전 유적들. 아득한 시간이 부유물처럼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어디선가 돌탑을 깎고 다듬는 석공의 가쁜 호흡과 금당 서까래를 올리는 목공들의 기운 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절터에 돋아난 키 작은 풀들은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감은사가 만들어지던 그 시절과 다름없이. 들뜬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며.

사실 감은사는 문무왕의 호국의지가 담긴 절이면서, 빼어난 불교 유물이 발견된 ‘예술적 사찰’이기도 하다.

동국대 한정호의 논문 ‘감은사지 삼층석탑 창건 과정과 의장계획(意匠計劃)에 대한 연구’의 첫머리를 아래 옮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왕과 신문왕 시기에 걸쳐 창건된 감은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감은사가 창건되던 시기는 삼국통일을 통해 한반도를 장악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흡수·통합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시기로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통일국가의 위상을 표방하기 위한 왕실 주도의 조영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다. 이와 함께 신라의 불교미술에서도 전대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양식이 대두되는 일대의 변혁기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1959년 감은사지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시작됐다. 그즈음 서쪽 삼층석탑을 해체·수리하던 사람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발견을 한다.

신라인들의 예술적 감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함과 사리병 등 사리를 봉안하는 일체의 장치)가 나온 것이다. 이것들은 1963년 보물 제366호로 지정된다.

1996년엔 동쪽 삼층석탑의 해체·조사 과정에서 서쪽 석탑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사리장엄구가 발굴 팀에 의해 수습된다. 또 한 번의 ‘의미 있고 유쾌한 발견’이었다. 이와 관련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8권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선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예술과 사리장엄구에 관한 서술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통일 전쟁이 끝난 후 통일신라에서는 안정된 문화가 발달했으며, 특히 불교를 중심으로 한 조형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사리장엄구 역시 통일 직후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 경에 가장 화려한 양식으로 구현됐다. 이 시기의 사리장엄구는 고신라의 문화적 전통과 새로이 전래된 당나라 문화의 영향이 결합돼 새롭고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 삶, 예측할 수 없기에 희망도 있는 게 아닐지

‘통일신라시대 초반의 뛰어나고 정교한 금속공예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받는 감은사지 사리장엄구를 바로 눈앞에서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61년 전 그걸 처음으로 발견한 조사원의 심장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뛰었을까? 그리고, 1천300년 전 신라의 공예가는 자신의 예술품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후손들과 만나게 될 것을 짐작이라도 했을까?

우리 또한 까마득한 과거에 존재했던 신라의 예술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인간은 어느 시대, 어느 땅에도 없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누구도 앞날을 알 수 없기에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희망을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닐지.

대숲과 솔숲에서 풍겨오는 향기 사이로 걷는 감은사지에서의 산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생각들이 허망함과 외로움을 떨쳐낼 작은 힘이 돼주니 고마운 일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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