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빅브라더(Big brother)를 등장시켜 당원의 모든 것을 감시하는 전체주의 국가의 모습을 그려낸 소설 ‘1984’에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표현을 등장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이끈 윈스턴 처칠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진실만이 오롯이 담겨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그 무서운 역사조작의 징후는 오늘날도 끊임없이 감지된다.

지난 주말에 유명인사 두 사람이 사거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느닷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도 향년 10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하루 사이에 잇달아 일어난 두 거물 인사들의 죽음이 또 한 번 민심을 두 쪽으로 갈라내고 있다. 걸핏하면 청백전을 벌이는 대한민국의 고질병이 또 한차례 도지고 있다.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박원순 시장의 자살은 시장실 여비서가 장기간 성추행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한 게 원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유력하다. 장례형식을 서울시장(葬)으로 치르는 일에 대한 저항이 심각하다. 공무상 순직도 아닌 ‘자살’에 요란을 떠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 흐드러졌다.

백선엽 장군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이 아닌 대전현충원으로 장지가 정해진 일을 놓고 말이 많다. 이 논란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논쟁을 일으켜 왔었다. 백선엽 장군은 6·25 한국전쟁에서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을 수습해 기적적인 반격을 지휘해낸 전쟁영웅이다. 그러나 젊은 날 소위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 토벌 활동을 했다는 전력이 질긴 꼬리표로 달려 있다.

안희정, 오거돈이 미투(Me too) 폭로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상황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급서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민주당은 파장을 끊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슬퍼하는 같은 입에서 호국영웅 백선엽 장군 사망에 대한 애도의 말 한마디도 안 나오는 행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문득, 지난해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해 한동안 여론을 달구었던 항일 무장투쟁 영웅 약산 김원봉 서훈 논란이 떠오른다. 그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지휘한 일을 간과할 수는 없다는 반론이 거셌다. 약산 선생에 대한 서훈 당위성이 주장되자 시중에는 “김일성에게도 훈장 주자고 하게 생겼다”는 걱정까지 나왔었다.

마치 독립운동하다가 흉탄에 맞아 죽은 애국지사마냥 치러지고 있는 박원순 시장 장례 모습을 선뜻 공감하기란 어렵다. 어떻게 똑같은 사고체계를 갖고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는 그렇게 야박할 수 있는지, 그 지독한 편견과 모순에 찌든 열광적 ‘순수주의’의 테러리즘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영락없이, ‘외눈박이 거인들의 나라’에서 철저히 무시당하는 난쟁이들 신세다. 평생 나랏돈의 낭비를 걱정해온 시민운동가 박원순이 지금의 이 거창한 야단법석을 과연 즐거워할까. 삼가 백선엽 장군과 박원순 시장 두 분의 영전에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