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해맞이 공원 주차장. 군락지에서 가져온 모감주나무들.

문득, 바닷가로 길을 잡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노오랗게 부채 같은 손을 펼쳐든 가로수의 행렬이 마중을 나왔다. 모감주 꽃이었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지난밤 내린 비는 산책길을 모감주꽃잎이 만든 황금비로 물이 들였고, 나무가 서 있는 발치에 노란 카펫을 깔아놓았다. 여름나무 영화제에 초대받은 손님이 되어 꽃길을 걸었다.

모감주나무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닳거나 줄어든다는 뜻에서 모감(耗減)이라고 하고,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에 염주나무라고 한다. 노란색 꽃이 하늘에서 아니 나무에서 떨어질 때면 그야말로 황금비를 맞는 기분이다. 그래서 Golden Rain Tree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포항시 동해면 발산리에는 군락지가 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그곳이 어디인지 찾기 힘들지만 꽃이 피는 6월에서 7월에 만개할 때면 멀리서도 황금빛 꽃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이 꽃놀이하기에 가장 좋은 시절이다. 고개를 들어 모감주나무 꽃을 올려다본다. 노란 깃털에 자그마한 꽃들을 줄줄이 달고 있는데 쫑긋 뒤로 젖힌 꽃잎 안에는 붉은 점을 품고 있다. 홍옥 같은 색점이 노란 꽃의 색을 더 짙게 만든다.

꽃말은 자유로운 마음, 기다림이다. 모감주의 씨앗이 이런 이름을 낳게 했을 것이다. 초여름의 열매는 피망같이 부풀어 오른다. 공기가 한껏 들어있어 작은 풍선을 나무에 매달은 듯 보인다. 갈색에서 진갈색으로 열매의 껍질은 바짝 말라간다. 그리고 드디어 세 갈래로 갈라진다. 갈라진 한 껍질에는 두서너 개의 씨앗이 붙어 있다. 바람은 씨방을 분리시킨 뒤 날려 보낸다. 씨방의 형태는 바람을 잘 받을 수 있는 구조여서 120미터까지 날아갈 수 있다. 드디어 출항할 때가 다가왔다. 씨방은 바람을 받는 바람개비이자 물에 뜨는 보트이다. 모감주는 이 껍질을 파도에 실어 보내려고 바닷가 근처에 군락지를 이루었다.

모감주는 여행자이다. 여행자의 본분을 몸 안에 새겨 넣었는지 여행에 필요한 도구를 안고 태어났다. 껍질은 어느새 열매를 나르는 돛단배가 된다. 모래톱에 정박도 하지만 잠시 뿐이다. 그리고 여기가 아닌 어떤 곳을 향한다. 가을에 씨앗은 열매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돛단배가 되어 작은 그리움을 담은 까만 눈동자를 싣고 그리운 나라로 간다.

모감주 씨앗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도착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겨울 편서풍을 만나야하고 다섯 달 이내에 3500킬로미터를 이동해야 성공한다. 이모든 조건이 맞아야 꽃을 피운다. 하지만 모감주 씨앗은 이 험난한 모험을 선택했고 성공했기에 포항시 동해면 발산리에 자신의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군락지의 가지를 잘라 환호동 해맞이 공원 여기저기에 또 바닷가 산책로에 노란 꽃등을 내걸었다. 군락지가 확장된 것이다. 꽃이 혼자 애쓰던 일을 포항 사람들이 거들고 나섰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천연기념물 제371호로 지정하여 보호받는 모감주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도끼질을 하면 나뭇결 따라 쪼개지는 보통 나무들하고 달리 코르크나무처럼 부서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땔감으로써 가치가 썩 없었을 것이다. 사실 모감주나무는 밀원식물이다. 꽃이 활짝 피면 꿀벌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그런데 그런 가치는 미처 몰랐고 이 나무가 세계적으로 희귀종이라는 것도 미처 몰랐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땔감으로써의 가치 없음이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2018년 9월 평양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 심은 나무도 바로 이 모감주나무였다.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리라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왕에서 서민까지 묘지의 둘레에 심을 수 있는 나무를 정해 주었다고 하는데 모감주나무는 학덕이 높은 선비의 묘지에만 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모감주나무 잎과 꽃으로 염료도 만든다니 꽃처럼 어여쁜 옷으로 탄생하리라 상상을 해본다.

노란빛의 여행자 모감주의 계절이다. 꽃길만 걸어도 좋은 여름이니 모감주 따라 길을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