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하회마을과 유성룡, 그리고 임진왜란

부용대 절벽 위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부용대 절벽 위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우리나라 수많은 마을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마을이 안동 하회마을이다. 우뚝 솟은 절벽, 마을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옛 마을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난 극복의 명재상 유성룡이란 대스타 때문이다. 스승 퇴계가 건축에 깊은 애착을 가졌듯이 서애도 30살에 낙수(落水)의 서쪽 언덕 밑에 서당을 지으려 할 정도로 건축에 일가견이 있다.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호를 서애(西厓·서쪽 언덕)라 했다. 서애는 풍산에서 옮긴 병산서원 장소도 정해주었고, 원지정사도 지었으며 말년에 옥련정사도 지었다.

 

하회마을 섶다리.
하회마을 섶다리.

#. 흐르는 강물, 부용대와 겸암정사

하회, 이름만으로 가슴이 울리던 곳이다. 필자가 1985년에 처음 왔을 때 순수했던 하회마을은 눈물 나는 정겨움이었다. 그 뒤 많이도 와 보았지만 외부에 알려질수록 비례하여 점점 빤질빤질하게 망가져 지금은 철저히 상업화되어 자연 경관만 거시적으로 보고 미시적인 마을 구석구석은 보지 않는다. 오늘도 마을입구에서 마을을 피하고 강둑을 걸었다. 하얀 연꽃이 활짝 피어 여름의 서곡을 알리고 강둑의 벚나무도 세월이 흘러 굵은 나무에 잎이 무성하여 햇볕도 막아주고 바람도 일렁거린다. 하얀 백사장과 흘러가는 강물을 보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눈물 나는 동요가 그림처럼 선명히 떠올라 깊은 정서의 우물로 빨려 들어간다.

하회마을의 압권은 강 건너 조용히 서있는 부용대 바위다. 마을이 속세라면 강과 부용대는 극락인데 만송정 솔숲이 속세와 극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전에는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면 지금은 섶다리를 놓아 걸어가는 낭만도 있고 부용대 가기도 쉬워졌다. 고운 모래를 적시고 흘러가는 강물은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강물에 뛰어내리고 싶지만 마음만 강물에 적시고 부용대로 올랐다. 짜릿한 긴장감이 강물에 휘감긴다. 절벽 아래로 강물보다 넓은 백사장과 만송정, 기와집과 초가집이 적당히 어우러진 하회마을이 꿈결마냥 속삭이듯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올려다보는 앙시법(仰視法)은 우러러 보는 맛이 있지만, 이처럼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은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던져준다. 부용대 절벽 산길 타고 적당히 내려가면 은자가 조용히 사색하며 학문을 펼칠 수 있는 겸암정사가 나온다. 서애의 형 겸암 유운룡((1539~1601)이 1567년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지었고 하회마을 앞의 만송정 솔숲도 조성했다. 겸암은 16살 때부터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31살에 또다시 향시에 합격하자 퇴계가 너무 연연한다고 나무라자 벼슬에 뜻을 접었다. 퇴계가 죽고 34살에 아버지의 권고로 고관의 자손에게 주어지는 음직(蔭職)으로 낮은 벼슬을 시작한다. 1584년, 46살에 동생 서애는 판서의 직위에 있을 때 인동현감을 6년 한다. 이때 목민관으로 경위표를 만들어 세금부정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준다. 이 경위표에 힌트를 얻은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새로운 경위표를 만들었다.

명리를 떠나 민중을 위해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서애를 큰 인물로 키우는 뒷받침을 했고, 징비록 내용 일부는 겸암의 조언이 들어있다. 주인도 출타중이고 겸암도 떠난 정자에 올라 필자가 여러 번 여기에 앉아 특강했던 기억이 새롭고, 정자를 반질반질하게 잘 관리해놓은 후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겸암정사.
겸암정사.

#. 서애와 옥련정사

겸암정사에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화천서원을 지나 옥련정사에 갔다. 서애가 1589년에 지은 집인데 단단하고 기품 있게 잘 지었다. 지금은 담장을 수리 중이었고 휘어진 소나무는 옥련정사를 더욱 품격 있게 한다.

지승유인(地勝由人), 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명승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하회마을이 자연경관도 뛰어나지만 서애가 없었다면 하회의 명성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서애는 어떤 사람인가.

“천자(天資)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적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 한편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드린 적이 별로 없었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을 구해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상반된 인물평을 ‘선조신록’에는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공통적으로‘총명하고 기상은 활달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박식하여 사람을 탄복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했다.

서애는 외가인 의성현 사촌리에서 강원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로 태어나 21살 때 퇴계 문하에 들어간다. 그가 주자의‘근사록(近思錄)’을 들고 퇴계에게 요목(要目)을 물어나가자 퇴계는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며 칭찬하였다. 25살 때 별시문과 병과로 합격하여 과직에 나가 영의정 하는 51살 때까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도 난관을 잘 헤쳐 나가 27년간 고위관리로 순탄한 벼슬을 지냈다. 서애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총괄하여 극복하였으나 전란 중 화의를 주장했다고 파직되어 이곳에 조용히 지내면서 전쟁 때 백성들의 고통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의 교훈을 적은‘징비록’을 완성한다.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련정사.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련정사.

#. 전쟁의 참혹함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의 침략정보가 있었지만, 학봉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은 절대 없다는 결정적 잘못된 보고로 전쟁대비도 제대로 못한 원인도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참혹하게 당한 것은 선조의 무능과 동, 서로 갈라진 당파싸움, 그리고 썩은 관료들 때문이었다.

율곡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이면서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700여 명을 모아서 승병들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으로 향하다가 그의 전공을 시기한 관군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들이 해산되고 겨우 700여 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던 중봉 조헌(1544~1592)이 전쟁 중에 올린 상소를 보자. 1583년 북쪽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백성들로부터 신의를 잃은데 있다고 보았다.

그때 상민은 양민으로 올려주고 벼슬길도 열어준다고 했고, 군량을 바치는 자도 서얼의 신분을 면해주고 벼슬길도 열어 주겠다고 하여 용기 내어 적의 머리를 베어왔으며, 군량을 가진 자들은 재산을 다 털어 먼 경원까지 실어와 바쳤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된 후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자의 공은 인솔 장수 정언신(1529~1591)에게만 돌아가 북도의 용사들은 배신감에 원한을 삭였다. 조헌의 길고 긴 상소문을 보면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그는 “하찮은 종이라도 공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어 우러러보는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소서.”라고 절규했다.

같은 시대 조선 중기 한문 4대가로 정주학자인 영의정 신흠(1566~1628)도 “오늘날 벼슬아치들을 보면 거의가 뇌물을 쓰고 등용된 자이거나, 아니면 임금의 사랑을 받는 권력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력자가 뒤를 봐주는 자들이다.” 뇌물에서 시작한 자는 항상 탐욕으로 끝나고, 권력에서 시작한 자는 항상 포악으로 끝난다 했다.

임란 당시 서울의 참혹함을 서애는 “1592년(선조 25) 4월 30일 임금의 어가가 서울을 빠져 나가자 백성들은 맨 먼저 장예원과 형조(법무부)를 불태웠는데, 이 두 곳이 공,사 노비들의 문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불태워 궁궐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리고 왕세자 임해군의 저택과 병조판서(국방부장관) 홍여순의 집이 불탔는데 모두 적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태웠던 것이다.” 잠시 떠났던 백성들도 돌아와 적들과 함께 물품을 매매하고 점포들은 사람들도 가득찼고, 적첩(신분증)을 주어 자유롭게 출입하니 적들의 노역에 순종했다. 심지어 “누군가가 적을 죽이려 계획하면 밀고하여 그를 잡아다가 종루 앞이나 숭례문 밖에서 참혹하게 불로 지져 죽였다.” 왜군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하룻밤에 성안의 집들을 모조리 불태웠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려 얼마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백성 중에는 굶주림과 유행병으로 죽은 자가 열 명 중에 팔, 구명이나 되었다면서 “결국 우리 백성들은 더할 수 없이 큰 액운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사람의 실수에서 빚어진 결과라지만 이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해 놓았다.

 

낙동강과 부용대 절벽.
낙동강과 부용대 절벽.

서애의 이엽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보자. 포로로 잡혀가서 수군대장이라고 하니 풍신수길이 매우 융성하게 대접해주고 은과 비단 등도 주고 큰 집을 주어 편히 살도록 했다. 이엽은 그 물품들을 일본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환심을 사고 붙잡혀온 백성 수십 명과 도망치려다 현상금 쌀 200석에 우리 백성이 밀고하여 이엽은 배를 찔러 자결하고 나머지는 다 붙잡혔다. 왜장은 죽은 이엽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풍신수길에게 보고 한 뒤 그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매어달고, 잡혀온 수 십 명은 산채로 불태워 매우 참혹하게 죽였다.

당파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조헌은 적과 화친을 주장하다가 적을 불러들인 서애를 진회보다 더 크다고 했고, 정여립 사건 때 수많은 인재들 1천 여 명이 옥사당할 때 동인을 구해주지 않았다고 비난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학봉을 잡아오라고 하여 압송되어올 때 서애는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직산까지 잡혀오던 학봉을 경상도 초유사로 보내게 하고 그가 죽자“평생 동안의 지우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통곡하는 뜨거운 우정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서애는 국난극복의 총 지휘자로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