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

영화 ‘페인 앤 글로리’ 포스터.

전달되지 않은 화해와 용서는 유효한가. 70년의 세월 동안 온 몸에 새겨진 상처와 정신적 고통들의 뿌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노쇄한 영화감독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의 매니저와 주치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32년 전 시사회에서 단 한 번 보았던 그의 영화를 다시 볼 기회를 가지면서 주연배우의 연기에 대해 그때와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 평가에서 시작해 오늘날 그를 만들었던 변곡점들을 되새긴다. 그 변곡점들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것들은 강렬하고 찬란했으며, 괴로웠으며 아팠던 것들이었다. 모두 ‘어디에서’ 왔는가에서 시작해 ‘어떻게’ 왔는가를 말한다.

파편적으로 그의 과거와 조우하면서 그 기억들이 주는 양면성을 탐색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인 ‘고통’과 ‘영광’이다. 기억이 순차적으로 오지 않듯이 예고없이 치고 들어오는 회상들은 어떻게 왔는가, 즉 어떤 환경에서 떠올려졌는가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진다.

원인없는 결과가 없듯이, 고통과 영광이 층위를 만들고 쌓아올려진 층위의 결과물로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로 이야기하는 자전적 일대기가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영화를 이야기하며 영화 밖에서 영화를 끌어 온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전작들이 탄생하게 됐던 이유를 만나게 되고, 그 이유가 되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다. 삶은 어떻게 영화가 됐고, 영화는 어떻게 삶이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영화 밖에서 들고나던 기억은 경계를 허물고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상처가 영광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 속에서 묶여있던 과거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새롭게 작별을 고한다. 날카로웠던 집착은 무뎌지고 다듬어져 더이상 ‘상처’가 되지 못한다. 그의 전작들이 보여주었던 파격과 수다는 이처럼 부드러워지고 깊어진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눈빛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영화감독인 살바도르는 어린 시절 신학교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게 되면서 지리를 알게 됐고,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게 되면서 해부학을 배웠다고 말한다. 영화를 통해 시야를 넓히게 됐으며, 영화를 통해 눈빛이 깊어지는 과정을 겪게 됐다.

인생의 넓고 깊음이 오롯이 영화에서 기인했음을 읊고 있으며, 그 영화를 이뤘던 요소들이 그의 과거에서 시작되어 의미를 달리하며 재해석되고 새롭게 빛깔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죽음을 향해가는 삶에 대한 과거의 작별이 아니라, 중단되지 않는 삶에 있어서 과거의 기억들이 ‘재배치’되는 과정에 대한 영화다. 유효하지 않던 화해와 용서는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직면하게 되면서 재배치 된다. 화해와 용서는 재배치를 통해 유효성을 획득하고, 고통과 영광은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 다시 출몰하여 재배치되느냐의 문제가 된다. 70년의 세월 동안 새겨진 상처와 고통, 그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되어지던 영광은 시기와 자리를 바꿔가며 재평가되어 지고 있다. 영화 안과 밖을 넘나들던 이야기들은 픽션과 넌픽션의 경계를 허물고, 살바도르로 분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오늘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회고록이 아니라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담은 영화가 된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순간 탄성과 함께 깨닫게 된다. 영화의 안과 밖,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관계 맺었음을. 삶은 취하고 버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나를 배치하느냐의 문제인 것. 극단의 고통과 영광이 자리를 바꿔 앉을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네이버와 구글플레이, IPTV에서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