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홍콩의 정세변화로 인해 포스트 홍콩으로 싱가포르가 급부상하고 있는것 처럼 포스트 주거지의 대안으로 포항이 부상할 수 있도록 단기가 아닌 장기적인 시각으로 지진복구 등 정주환경 정비, 기업친화적인 정책, 국제항만도시에 어울리는 다양한 인프라를 꾸준히 정비해나갈 필요가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포항지열발전소에서 서울중앙지검 소속 검사와 수사관이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경북매일 DB

그동안 시끄러웠던 홍콩이 마침내 새로운 이정표를 찍었다. 지난 6월 3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전국인민대표회의(제13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제20회 회의에서 출석한 162명의 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국가안전유지법(中華人民共和<56FD>香港特別行政<533A><56FD>家安全維持法, 이하 홍콩안전법)’을 가결하였기 때문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제49호 주석령에 서명한 직후 공표된 이 홍콩안전법은 7월 1일 0시부터 시행되었다. 무려 150여 년 동안의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중국으로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역사적인 1984년 영국과 중국간 합의 당시 반환 이후 최소 50년간은 기존의 사법, 금융, 경찰, 관세 제도를 유지하기로 함에 따라 ‘1국 2제도’를 탄생시켰던 홍콩이었지만 1997년 7월 1일 반환일로부터 불과 23년 만에 그 약속이 깨어지면서 홍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전인대 상무위원회에서 유일한 홍콩 선출위원인 탄 야오쫑(譚耀宗)은 30일 회의 종료 직후 홍콩 공영방송(RTHK)과의 인터뷰에서 홍콩안전법에는 ‘사형’이 없다고 함으로써 종신형이 최고형임을 알렸지만 그때까지 금고 10년형이 최고로 알려지던 것보다는 처벌 수위가 대폭 강화된 모습이다. 법안은 홍콩에서 국가 분열이나 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세와 협력하여 국가 안전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인 핵심은 치안 유지를 담당할 ‘국가안전유지공서’의 신설이다. 일부 외신에서는 홍콩안전법이 조기에 성립된 것은 당장 오는 9월 6일로 예정된 홍콩 입법회(의회) 선거를 대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홍콩특별행정구 구위원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이 18개구 중 17개구를 차지하였으나 앞으로 이 홍콩안전법 조항을 악용 내지는 확대해석할 경우 범민주 진영 인사가 선거관리위원회의 출마자 심의과정에서 걸러져 아예 선거 참여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홍콩안전법을 계기로 미국과 중국 간 대립도 점차 가열되고 있다. 이 법이 가결되기 하루 전인 6월 29일 미국 정부는 기밀기술의 홍콩 수출을 억제하는 조치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1992년 ‘1국 2제도’를 전제로 홍콩에 관세·투자·무역 등에 대한 ‘특별지위’를 부여하는 ‘홍콩 정책법’(Hong Kong Policy Act)을 도입, 시행해 왔다. 하지만 이 법이 폐기될 경우 홍콩은 중국 본토와 같이 품목에 따라 대미수출에 최고 25%의 징벌 관세를 부담해야만 한다. 윌버 로스(Wilbur Louis Ross Jr.)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이날 성명에서 “수출 허가 예외 등 홍콩에 부여했던 특혜 규정이 중단”되었으며 “특별대우를 없애는 추가 조치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홍콩안전법으로 중국의 홍콩 지배가 강화될 경우 홍콩으로 수출되는 미국 기술이 중국군이나 국가안전부로 흘러 들어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홍콩에 관계되는 중국 정부 관계자들에 대한 비자발급 제한 조치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 자오 리지엔(趙立堅) 대변인은 6월 29일 정례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중국은 홍콩지구의 문제에서 악랄한 행동을 취한 미국인에게 비자발급을 제한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밝히며 맞섰다.

이처럼 국제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홍콩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특별한 지역으로 기억되었던 곳이다. 1842년 ‘난징조약’을 계기로 영국 총독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도시였지만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홍콩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1954년 고 금사향이 발표하였던 히트곡 ‘홍콩아가씨’는 6·25전쟁으로 상처를 입었던 많은 국민의 가슴속 아픔을 감싸준 경쾌한 치유의 노래였다. 1960-70년대까지도 비교적 부유층 여성들에게 홍콩은 그야말로 선진 도시였고, 쇼핑의 천국이었으며, 새로운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환상의 도시였다. 여성만이 아니라 필자를 포함한 지금의 50대 남성들은 홍콩 영화의 전성기와 함께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소룡의 당산대형, 정무문, 용쟁호투 등 무협 액션 영화를 필두로, 1980년대에는 성룡의 취권 등이,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홍콩느와르의 상징과도 같은 영웅본색 등 홍콩 영화가 국내 극장가를 휩쓸었다. 한때 홍콩은 우리나라와 대만, 싱가포르까지 합쳐 아시아의 4마리용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 반환 이후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져가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한편 홍콩의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제44차 유엔 인권이사회의 화상 연설에서 “홍콩 안전법은 법을 위반한 극소수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며 홍콩 거주 압도적 다수의 생명과 재산, 기본권, 자유는 보호될 것”이라고 강조하였지만 이미 국제 금융 자본시장의 흐름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과거 홍콩이 아시아의 국제 금융 허브로서 명성을 날린 것은 국제사회에서 영국령으로서 호주, 캐나다 등과 같은 선진국 지위를 부여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뀐 것이다. 50년간은 현행 체제가 유지될 것이라던 국제적 인식이 무너지면서 오랫동안 아시아지역 금융의 허브 역할을 수행했던 홍콩의 지위가 동반 하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포스트 홍콩의 지위가 싱가포르로 옮겨지고 있다. 그동안 아시아지역 사업거점의 본부를 홍콩에 두고 있었던 구미기업들이 그 기능을 싱가포르로 이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 상공회의소가 지난 6월 3일 발표한 설문 조사결과에서도 홍콩에서 사업 중인 미국기업 가운데 홍콩 안전법에 대해 어느 정도 우려가 30%, 매우 우려가 53.3%로 나타났다. 특히 조사대상 기업의 30% 정도는 홍콩에서 자본이나 자산, 사업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것을 검토한다고 답변하였다. 포스트 홍콩으로 싱가포르가 부상하는 데는 법인세율이 17%, 개인 소득세율이 최고 22%에 불과한 과세제도도 장점인 데다 중국어와 영어가 모두 능통한 사업환경 때문이다. 실제 6월 5일 싱가포르금융통화청(MAS)이 발표한 4월말 은행 비거주자의 예금 잔액은 전년 동월 대비 44%가 증가한 620억 싱가포르달러를 기록하였다. 이는 1991년 이후 최대 증가액이다. 싱가포르 민간은행의 외화예금도 대폭 증가하였다. 자본 유입의 진원지는 아마도 홍콩일 것이다. 이러한 자금 흐름에는 미국 등 구미기업만이 아니라 그동안 중국 본토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홍콩에 자본이나 자산을 두고 관리하고 있던 중국 부유층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인 개인금융 회사인 크레디 스위스, UBS 등은 물론 헤지펀드 등도 홍콩 안전법 성립을 계기로 지난 수 개월간 활동거점을 싱가포르로 옮기면서 인재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포스트 홍콩으로 싱가포르가 부상하게 된 것은 즉각적인 어떠한 정책을 내세우거나 시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평소에 그와 같은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항도 미래지향적으로 조기에 지진 특별법을 기반으로 지역의 재생, 복구, 재건에 힘써 새로운 정주 환경을 만들고, 기업의 투자와 활동에 친화적이며, 외국인들이 큰 어려움이 없이 시내를 활보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국제 항만도시에 어울리는 기반을 꾸준히 정비해나갈 필요가 있다. 어떠한 사건이, 어떠한 충격으로 인해 포스트 홍콩의 대안으로 싱가포르가 부상되는 것처럼, 포스트 주거지의 대안으로 포항이 급부상하더라도 큰 무리 없이 인구나 기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