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진<br>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
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인간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물건 하나를 주겠다. 사용법을 꼭 지켜라. 첫째, 많이 나눠줘라. 둘째, 대가를 바라지 말라. 셋째, 돈 주고 사지 말라. 넷째, 자주 표현하라’.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인 사랑사용법이다. 하지만 인류는 사랑을 사용법대로 사용치 못하고 살고 있다. 예수님, 석가모니 부처님까지 인간 세상으로 출장(?)와서 사랑을 제대로 사용하라고 역설했지만 세상은 아직도 다툼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이다.

그럼에도 맹렬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뜬다. 받을까말까 망설인다. 혹시 급한 용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수신버턴을 누른다. 쟁반을 구르는 구슬소리 같은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작은 소리통을 통하여 들려온다. “…. 사랑합니다.” 느닷없는 여인의 사랑고백에 화석같이 굳어있던 중년의 가슴팍이 살짝 떨린다. 찰나의 시간에 발칙한 생각이 든다. ‘누구지?’ 떠나보낸 기억저편 첫사랑 여인의 팜므 파탈인가? 지친 영혼을 달래겠다며 퇴근길 들리던 단골 선술집의 뜸한 발걸음을 불러들이려는 여주인의 얕은 수작인가? 옆지기가 혹시 들을까 음량키를 줄이려다 잘못 눌러 더 크게 하는 대참사를 겪는다. 잠시 혼미했던 정신 줄을 잡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작은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입자들을 귓구멍으로 몰아넣는다.

“고객님 잠시 시간이 되시면 이번에 새로 나온….” 선풍기 강풍모드로 급히 돌아가는 콜센터 여직원의 말임을 알게 된다. - 어찌하랴 여인으로부터 ‘사랑합니다’란 고백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는 중년이 있으랴!- 몽환에서 깨어나고 짧은 시간 동안 외도 아닌 외도에 괜한 쑥스러움이 밀려온다. 워낙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사랑합니다’란 말 때문이다. ‘고객님’이란 호칭 앞부분 말이 수신불능 상태가 된 것이다.

가끔씩 오는 콜센터 직원들의 전화응대 예절 말 ‘고객님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데 어찌 매몰차게 전화를 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말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얼굴도 모르는 고객을 상대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직원들의 애환을 생각해보게 된다. 회사의 방침이니 전화응대어로 사용할 것이다. 어쩌면 갖은 험한 말로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제적 방어용일지 모르겠다. 물론 고객들도 그들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으로 대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건 팔아먹으려는 얄팍한 상술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 최고 고운 말인 사랑한다는 말로 고객을 응대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말일 수 있다.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일지라도 숭고함, 고귀함, 아름다움이 깃든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연결되는 일은 신이 정해준 사랑 사용법 중의 하나 ‘자주 표현하라’이다.

말은 의식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콜센터 사람들은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아름다운 사람일 것 같다. 척박해지는 세상살이에 빈말일지라도 가족과 이웃에 ‘사랑합니다’란 자주 표현했으면 좋겠다.

콜센터 사람들의 고운 인사말에 “진짜로 사랑합니까?” 되물어 바쁜 그들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