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바뀌고 있는 여행의 동반자

헬싱키를 뒤로 하고 핀란드 만을 건너 탈린으로 향하는 중이다.
헬싱키를 뒤로 하고 핀란드 만을 건너 탈린으로 향하는 중이다.

◇ 구글맵 안내를 무시한 걸 후회하다

로시 데려와서 일본 일주를 다녀온 지가 4년이 지났다. 매년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정하고 그것만은 좌고우면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7년이 지났다. 이제 돌아가면 올해 마지막 버킷 리스트(책방 이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불혹이 지나며 그 이전보다 시간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걸 실감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집단은 아마 구글이 아닐까. 숙소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가려고 구글맵을 열고 경로를 검색하니 빠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알려 준다. 무시하고 어제 왔던 빠른 길로 나가니 경찰이 통제 중이다. 구글맵이 안내를 믿어야 했다.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실시간 교통 정보를 반영해 길을 안내한다. 결국 처음 안내한 길로 돌아왔다. 안드로이드폰과 구글을 사용하는 모든 사용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도 GPS나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면 어디서 무엇을 찍었는지 기록이 남는다.

 

13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탈린 시청. 구시가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13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탈린 시청. 구시가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얼마 전 재미삼아 구글 지역 정보에 올렸던 사진들이 조회수가 25,000회가 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들은 이렇게 개인이 올린 정보를 바탕으로 더 몸집을 불리고 이익을 취할 것이다.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야말로 기업의 경쟁력이다.

구글은 어느 기업도 넘보지 못할 정보력을 이미 갖추었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에 엄청난 자본을 쏟아 붓고 있으니 구글을 뛰어넘으려면 새로운 ‘혁명’이 필요할 수도.

2013년 7개월 동안 배낭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챙겼던 것은 ‘론니 플래닛’이었다. 고작 6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정보를 얻는 방법은 책에서 인터넷으로 급속히 바뀌었다. 인터넷을 주로 사용하는 도구도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했고. 책의 가치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해졌고 ‘실시간’ 나의 행동을 결정하거나 바로 쓰고 버리는(?) 가벼운 정보를 책으로 얻는 시대는 저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책은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 고전을 재생산하고 영속해야 하는 지식만 담는, 책이 만들어진 시대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물건의 역할도 포함해야겠다. 어느 시대라도 수집욕을 떨치지 못하는 장서가는 존재할 테니. 이런 시대에 헌책방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에스토니아의 대표 작가인 안톤 한센 탐사레의 동상.
에스토니아의 대표 작가인 안톤 한센 탐사레의 동상.

◇ 헬싱키에서 탈린행 페리를 타다

헬싱키에서 탈린까지는 페리로 약 2시간 30분 거리다.(바이킹라인 오토바이 선적료 포함 편도 약 5만원) 페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왕복하고 그만큼 사람도 차도 물건들도 건너가고 온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올 때보다 오토바이 여행자들이 많았다. 배 안으로 들어가 주차하고 고정줄로 묶는 작업을 마쳐야 객실로 올라갈 수 있다. 제주도나 일본으로 오토바이를 실어갈 때는 직원들이 대신했었다. 어제 한 번 해봤다고 다른 라이더를 도와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탈린은 이웃 리가와 비슷한 분위기다. 오자마자 부츠를 볕에 말리고 빨래부터 했다. 말뫼에서 이곳까지 거의 달리기만 하고 이틀 비를 맞았더니 꼬질꼬질하기가 상거지나 마찬가지. 탈린에선 여유롭게 며칠 지내다 가기로. 여기서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진 약 350킬로미터.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500밀리리터 생수를 2유로를 주고 사마셔야 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선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물값 뿐만 아니라 기름값도 방값도 뭐든 다 비싸니 나 같은 여행자에겐 아주 가혹한(?) 곳이었다.

 

탈린의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정문. 옛 정취가 살아있다.
탈린의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정문. 옛 정취가 살아있다.

탈린에 와선 마음껏 쇼핑을 즐겼다. 그래봐야 이곳에 있는 동안 먹을 식료품만 잔뜩 샀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숙소에서 끼니를 대부분 해결한다. 탈린의 체감 물가는 북유럽 국가의 1/3 수준. 우유, 식빵, 뮤즐리, 잼, 소시지, 토마토, 마늘, 고추절임, 치즈, 계란, 빨랫비누 등등을 샀는데 21유로가 나왔다. 3일 동안 충분히 먹을 양이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소시지에 P선생님이 주신 쌈장을 발라 먹었는데 먹을 만했다. 고추절임도 맵싸하니 괜찮았다.

러시아에 들어가기 전에 로시 상태를 점검해야 했다. 체인 장력 조절하고, 에어필터를 꺼내 대충 먼지를 털어냈다. 다행히 큰 이물질은 없었다. 지난 번 바르샤바 패트롤 모터스에서 교환할 때 날벌레들이 필터에 끼어 있었다. 아마 다시 시베리아를 지나갈 때 같은 일을 겪을 듯해 공기흡입구를 아예 방충망을 구해 씌웠다. 체인과 스프라켓도 적산거리가 60,000킬로미터가 가까워 모스크바에 가서 교체해야 한다. 집에서 여기까지 달린 거리도 약 27,000킬로미터. 사용할 수 있는 거의 한계까지 온 듯. 그래도 자주 체인 오일을 바른 것이 효과가 있었다. 사고만 없었다면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하루 자고 나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숙소에서 체크아웃했다. 지금 묵는 곳은 주인이 자리를 지키는 곳이 아니고 청소하고 체크인 시간에만 잠시 들렀다 간다. 주차장에도 로시만 덩그러니. 아무래도 구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무료 주차장이 있는 곳이라서 차를 가진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듯하다. 우리 집인양 부엌도 샤워실도 사용할 수 있어 좋긴 한데 이렇게 휑한 분위기는 처음이다. 대부분 복작복작한 도미토리에서 지내다 큰 집을 전세낸 듯 있으니. 어제만 해도 거의 빈방이 없었다.
 

구시가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탈린 시내.
구시가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탈린 시내.

◇ 시대 아우르는 건축물 가득한 탈린을 걷다

탈린 구도심은 지금까지 들렀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옛 성벽이 일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성벽 안과 밖은 풍경이 딴판이다. 구도심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성벽 밖은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이 차분하다.

탈린도 리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건물을 올리고 이곳저곳 공사 중인 곳이 많다. 탈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전초지가 될 수 있는 지역이다 보니 북유럽 국가와 러시아 사이에서 많은 부침을 겪었고,(구도심의 높은 성벽이 그 증거겠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해가 1991년이니 신생 국가나 다름없는 셈이다. 외부로 나아가기 좋은 지역은 그만큼 외침의 가능성이 있으니 좋다 나쁘다 말하기가 어렵다.

탈린 거리를 걷다보면 중세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채롭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관광지인 구도심을 제외하곤 빠르게 개발되고 풍경이 바뀌지 않을까. 10년 후쯤 리가나 탈린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확실히 비교할 수 있겠지.

숙소로 돌아오다 호텔 카지노 주차장에서 몸집 큰 두 남자가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윽박지르는 장면을 봤다. 그는 도박빚이 있는 것일까. 탈린으로 오는 페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카지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곤 놀랐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넘어오는 페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리가에서도 시내 중심가에 많은 카지노들이 있는 걸 보고 놀라웠는데 오랜 세월 공산국가였기에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에 쉽게 물들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걸 하루 늦추었다. 느긋하게 하루 더 쉬어 가기로. 오늘도 나 이외 다른 손님은 없었고 짐을 최대한 줄일 생각으로 모든 음식 재료를 꺼내놓고 끼니마다 요리해 먹었다. P선생님이 주신 쌀로 마늘밥을 짓고 뜨거운 물에 쌈장을 풀어 된장국까지 만들었다. 쌈장국(?)은 의외로 먹을 만했다. 파만 있었어도. 이가 없으면 잇몸이니까 있는 걸로 뭐든 만들어 먹는다.

 

탈린 구시가지에 맥도날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탈린 구시가지에 맥도날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만의 여행 3원칙은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고, 쓸 수(기록) 있을 때 쓴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나중으로 미루면 후회와 낭패를 동시에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쓰는 건 옵션으로 치더라도 먹고 자는 건 가능할 때 무조건 1순위로 둬야 긴 여행에서 버티기 쉬운 듯하다. 오늘은 내내 숙소에서 밥만 먹고 비 구경만 했다. 내일은 최대한 아침 일찍 출발해 러시아 국경을 넘을 생각이다.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