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길고 느리게 이어지는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 터널에 붙은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어떤 시대의 중요한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동안에 그것이 변곡점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시대의 색깔을 규정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그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품의 하나로 참여하고 순간에는 불가능한 과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역사에 오래동안 남겨질 중요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감지할 수 있다. 마치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던 한 병사의 마음처럼, 우리는 분명 역사에 기억될 ‘코로나’라는 세계적인 유행병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아직 이 흐름이 어디로 나아가게 될지조차 알 수 없다.

세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일들을 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필자도 대학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의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문학에 대해 강의하는 이례적인 첫 번째 경험을 마무리하고 있다. 주어진 변화에 대해 인간이 항상 상상가능한 가장 최적의 대처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대학 사회의 각 영역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교육’이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 사이에 이해의 충돌이나 소통의 상실 등의 사례가 없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나의 이례적인 사례가 우리의 현재를 바꾸어 다시는 그 현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른바 ‘뉴노멀’의 혁명적인 경험을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모든 일들은 언제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변화하여 우리에게 익숙할 정도로 찾아오지 않았던가. 이 낯설고 비가역적인 경험이 전쟁이나 혁명과 비견될 경험인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전쟁이후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파편은 우리를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

요즘 눈에 띌 정도로 외부 활동이 줄어, 책을 꺼내드는 시간이 조금은 더 늘었다. 물론 ‘강의준비’ 같은 직업적인 목적이 아닌 독서는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래도 아무 일 없는 저녁에 멍하니 TV를 틀어놓는 경우보다는 서가를 뒤적거리는 시간이 조금 더 늘었다. 인간들 서로가 ‘지나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균열이 나게 되니,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독서는 분명 책을 매개로 한 나와의 대화이다. 책에는 보통 글자들만으로 지금 어디나 넘쳐나는 과잉된 이미지들이 존재하지 않은 까닭에 책을 읽고 있으면 머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스마트폰과 SNS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줄로 타인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던 인간이 그 연결에서 잠시 단절되어, 글자들이 주는 막막함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뇌는 잠깐의 멈춤 뒤에 다시 그 글자들을 모아 만들어내는 세계를 창조해내기 시작하게 된다. 글자들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와 대화하며 생각의 세계가 구체화되는 것이다

사실, 지금처럼 얼마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재능이나 개성 같은 독특한 자질들을 모두 양화하여 대신하게 된 시대에 있어서, 이와 같이 나와의 대화 같이 고립된 독서나 소통은 그저 불가피한 이례의 상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이상 상상을 필요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연결되어 저 멀리에 존재하는 사람의 마음조차 얼마든지 억세스하거나 다운로드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진자가 또 발생했다는 문자가 씁쓸해 아무도 만나지 않는 저녁에 습관처럼 TV를 켜거나 넷플릭스의 영화 목록을 뒤지고 뒤지기 보다는 서가에서 예전에 너무 열심히 읽어 마음 속에 구체적인 상상의 풍경들이 즐비했던 책을 다시 한 번 꺼내 읽는 일은 무엇보다 위안을 주는 일이다.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