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치열했던 경북지역 전투현장을 말하다 영천전투 참전용사 김점철 옹

6·25전쟁 참전용사 김점철 옹.

경북에서 6.25 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또 한 곳의 전투가 영천지구 전투다.

국군 제2군단 예하 제8사단이 1950년 9월 2일부터 13일까지 보현산 방어선까지 진출해 영천 점령을 기도한 북한군 제15사단과 공방전을 거듭한 끝에 격퇴하고 영천을 지켰다.

1950년 9월2~13일 돌격전 전개
6중대 3개소총 소대원 수백명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 당해
점령한 고지에 퍼붓는 포탄 공격
끝까지 버텨 인민군 후퇴 이끌어

이 전투에서 적은 5개 연대 1만2천명으로 추산되는 병력과 전차 12대, 76mm 곡사포 38문과 122mm 곡사포 18문이 투입됐다. 반면 아군은 7개 연대 1만5천명과 105mm 곡사포 26문, 57mm 대전차포 6문에 그쳤다. 병력면에서는 아군이 다소 우세했지만, 화력은 적이 월등히 앞섰다. 아군은 열세한 화력을 공군력으로 보충했다. 11일간 치열한 전투속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잃었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 3천799명의 적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전차 5대, 장갑차 2대, 각종 화포 14문, 소화기 2천327정, 차량 85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 아군은 29명이 전사하고, 148명이 부상당했으며, 48명이 실종됐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김점철 옹(90.8사단 21연대 6중대 2소대 하사)을 만나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되돌아 봤다.

-언제 입대했습니까?

△6·25사변 1년 전 입대해 광주 21연대에 배속됐습니다. 다시 강원도 삼척으로 가서 보병 8사단에 예속돼 48개월 동안 8사단에서만 복무했습니다.

-영천전투는 어떤 과정으로 참전했는지요.

△6.25전쟁 1년 전 태백산지구 공비토벌 작전에 참전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주문진으로 가서 주문진에서부터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적 탱크 앞에서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강릉, 대관령, 제천, 단양, 소백산, 풍기, 영주, 영천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저항을 못하고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영천까지 후퇴과정도 들려 주십시오.

△인민군들이 “니(네)가 부산 앞바다에 빠져 죽을래, 일본으로 도망갈래”라고 조롱하며 우리를 밀고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후퇴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습니다. 배가 고프면 빈집에 들어갔습니다. 뒤주를 뒤져 쌀이 있으면 생쌀을 먹기도 했고, 취사된 밥이 오면 밥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후퇴를 거듭하다 영천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3개월간 이발도 못하고 옷도 못 갈아 입었습니다. 총을 멘 거지 꼴로 후퇴를 했습니다.

낙동강을 건너면서 많은 전우들이 죽었습니다. 낙동강을 건넌 뒤 다리 한 칸을 폭파하기도 했습니다. 인민군이 쏜 기관총에 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밤길을 걸으며 많이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설움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천 화북면 전투가 치열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영천 시내에 인민군이 진입했습니다. 우리는 영천 위쪽인 화북면에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영천을 완전 점령하면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지요. 그래서 사생결단으로 돌격을 했습니다. 난생 처음 돌격을 해봤습니다. 10일 연속 전투한 것도 처음 입니다. 뒷심 무른 쪽에서 후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민군은 10일 동안 견디지 못하고 결국 후퇴했습니다.

-돌격할 때 심정을 어땠습니까?

△피아간 500m 이상 벗어나 있으면 사격을 하지 않습니다. 유효사거리가 넘으면 사격을 하지 않습니다. 공격출발선부터 인민군의 집중 사격이 시작됩니다. 총알이 바위나 돌에 맞으면 ‘윙윙’ 소리를 내며 튀기도 하고, 튄 총알이 땅 속에 박히기도 합니다. 엎드려 직사탄을 피하기도 합니다. 돌격 중 작은 돌이 있어도 그 옆에 엎드려 직사탄을 피하면서 돌격지점까지 나아갑니다. 적진의 개인 참호로부터 40m가 돌격지점입니다. 수류탄을 던질수 있는 거리가 40m 되니까요. 선임하사가 진지 주변에서 돌격앞으로 하면 수류탄 뇌관을 뽑아서 적진으로 던집니다. 그러면 적진에서도 인민군 방망이 수류탄이 날아옵니다. 수류탄이 교차하면서 터집니다. 도망갈 틈도 없습니다. 엎드려서 피하기도 하고, 가슴으로 수류탄이 굴러오면 손으로 젖히기도 합니다. 이런 것 처음으로 겪어 봤습니다.

돌격지점에 가서 그냥 후퇴하기도 합니다. 수류탄을 던질 기회를 못 잡고 후퇴합니다. 9월 2일부터 13일까지 돌격전을 펼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6중대 3개 소총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 1개 소대로 재편해 끝까지 싸웠습니다.

-무섭지는 않았습니까.

△무섭죠. 고지를 점령 못하면 총살이다. 뺏기면 총살이다란 지휘관의 명령에 이판사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그러던 중 후퇴했던 인민군이 우리가 점령했던 고지에 포탄을 있는대로 퍼부었습니다.

다시 고지를 뺏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뺏은 고지를 악착같이 사수했습니다. 고지를 사수하다보니 적 포탄이 고지에 마구 떨어졌습니다.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탄착점이 생깁니다. 거기서 포격이 끝날 때까지 버텼습니다. 그날 저녁까지 버터냈습니다. 그랬더니 최후승리를 했습니다. 인민군은 그 이튿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영천전투로 받은 훈장을 수여증으로 보관하신다던데.

△팬티 옆에다 비상용으로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4등 무공훈장 수여증을 보관했습니다. 그 수여증은 6.25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받은 훈장인데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소대가 돌격전 때 1개 부대 병력을 잡았어요.

-특진은 언제 했습니까.

△1951년 북한으로 진격하다 포위돼 포위망을 뚫고 나와서 특진을 했습니다. 이등상사(현재의 중사)로 그때부터 계속 선임하사를 했습니다. 소대원들을 생각하면 선임하사 위치에서 탈영은 생각할 수도 없지요.

-당시를 회고하니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요?

△아직도 눈을 감으면 전우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오늘따라 전우들이 무척 보고싶습니다.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되는 해입니다. 참전용사들의 나이가 90세 전후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각 기관단체에서 참전용사를 초청해 특별한 위로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라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는 국민들과 정부, 지방자치단체, 기독교계 등에 감사드립니다.

※김점철 옹은 1930년 7월 7일 전남 화순에서 출생했다.1948년 8월에 입대한뒤 전쟁 뒤 1953년 7월 제대했다. 김 옹은 육군 제8사단 제21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제2소대 소총소대 일원으로 영천대회전(永川大會戰)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훈장은 영천시에 기증했다.

/조규남기자

    조규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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