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연등이 걸려 있는 부귀사 보화루. 부귀사는 영천시 신녕면 칠밭골길 446에 위치해 있다.

산길을 접어들자 더이상 민가는 보이지 않고 차는 하염없이 숲을 빠져들듯 나아간다. 산은 적막감에 싸여 베일에 가려진 듯 조심스럽고, 무성한 나무들의 푸른 눈빛은 너무나 성성하여 두려움조차 인다.

네비게이션은 태연하게 그 길을 고집하는데 친구와의 대화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말수마저 줄어든다. 흔치 않은 경험이다. 잠시 그늘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연다. 커피를 마시며 애써 숲을 예찬해보지만 하오의 신록은 끊임없이 나를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다. 용기를 내어 꾸역꾸역 낯선 이름, 부귀사를 찾아 산길을 오른다.

부귀사는 신라 진평왕 13년(591년)에 혜림대사가 거조암과 동시에 창건한 14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닌 절이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이 주석한 절로, 도중에 폐사되지 않고 명맥을 이어온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고찰인 것이다. 산이 좋고 귀한 물이 있다는 산부수귀(山富水貴)로 알려져 약수는 아토피성 피부병에 효험이 탁월하고 각종 차맛을 내는 찻물로 유명할 만큼 수질이 뛰어나다고 한다.

몇 개의 굽이를 지나자 커다란 바위 아래 부도밭이 보이고 그 너머로 아늑한 분지형 터에 부귀사가 자리하고 있다. 어떤 인위적인 꾸밈도 없이 환하게 트인 공간 위로 뻐꾸기 소리만 쏟아져 내린다. 신비스러울 만큼 작은 절이 고요를 삼키며 참선 중이다. 결코 낯설지 않은, 그런데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신세계에 이른 듯 경이롭다. 여느 사찰과는 달리 깊고 깊은 산중에 자리한 때 묻지 않은 절이다.

불안했던 여정은 계단 위 보화루 앞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감탄사만 쏟아낸다. 소박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절이다. 보화루를 향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저절로 경건해진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은 없지만 보화루는 사찰의 마지막 문인 불이문에 해당한다. 저 해탈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나라, 불국정토에 이른다. 우측 담장 끝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큰 나무들의 눈빛도 넓고 깊다.

어쩌면 부귀사에 오는 동안 우리를 두렵게 했던 나무들은 천왕문을 대신했던 것이 아닐까. 현란하고 삿된 마음 돌아보지 않고 잡담을 이어오는 우리를 향한 무언의 경고였으리. 산 아래에서부터 이어지는 일주문과 천왕문을 마음으로 읽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숲의 적막함만 보였던 것이다. 모든 나무와 숲, 자연에는 오염되지 않은 혜안을 가진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담한 보화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면 부처님 세상에 닿을 수 있다. 누각 아래의 어두운 통로 저쪽 편은 마치 딴 세상처럼 밝고 환하다. 누각 밑의 어두움은 나의 어리석음을 뜻한다. 그 장애물을 극복해야 비로소 극락에 들어설 수 있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누각을 낮게 만든 것도 깊은 뜻이 숨어 있다. 머리를 숙이며 나를 내려놓고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즉 하심(下心)하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이다. 불교 공부에서 첫걸음이자 마지막이 곧 하심이다.

그 동안 수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절을 들어섰으며 법당에서의 백팔 배도 오로지 하심을 위한 기도였다. 그런데도 절문을 나서면서 그 간절함은 어디론가 흩어지고 일상은 또 허둥거리며 자기반성만 되풀이하느라 바쁘다. 절실함이나 일념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절 기행은 성숙한 외관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멀고 힘든 일이지만 하심하는 마음은 죽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하리라.

보화루를 통과하는 마음이 더없이 차분하다. 경내에 들어서자 몸과 마음이 불국토임을 먼저 알고 편안해진다. 절은 어떤 인기척도 없고 오래된 석등 하나 외롭다. 극락전을 지키는 배롱나무 그늘 뒤편으로 하얗게 피어서 지고 있는 클로버 무리들과 알 수 없는 꽃향기로 경내는 아찔하다. 빈 절에 들어서면 몸가짐과 행동은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고향집에 돌아온 것처럼 따뜻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극락전에는 주존불인 아미타여래불을 중심으로 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삼존불 뒷벽에는 1754년에 제작된,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양식의 후불탱화 미타회탱이 보인다. 부족한 안목으로 탱화를 감상하기보다는 법당의 아늑한 분위기에 이끌려 가부좌를 하고 앉는다.

불안과 공포, 평화와 행복을 오갔던 일련의 마음들을 모처럼 들여다본다. 일상을 따라다니던 생각과 잡념의 징그러운 고리들, 쓸어내고 비워내도 다시 쌓이는 탐욕들을 가만히 응시해 본다. 이내 마음이 고요해져 온다. 친구는 요사채 뜰에 앉아 시간을 즐기고 나는 수행기도도량인 부귀사의 청정한 맥박 소리를 듣는다.

요사채를 돌아 작은 마당에 들어서니 요사채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스님은 잠시 포행이라도 나가신 듯하다. 뜰 위에 쌓여 있는 장작과 큰 채반에 널린 밥이 유월의 햇살 속에서 말라가고 있다. 수행 중인 스님의 삶과 첩첩 산중에 홀로 깨어 있는 작은 절이 내 안에 불을 밝힌다. 보화루 처마에 걸린 하얀 지등(紙燈)을 향해 두 손 모으는 내게 말씀 하나 들린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가지느냐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