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1629년경(왼쪽) · 1669년경 자화상.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화가 렘브란트(1606∼1669)는 ‘빛의 마법사’라고 불린다. 빛과 어둠의 대비가 극명한 신비한 분위기의 걸작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00여 점의 자화상을 그린 렘브란트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자화상을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20대 초반 화가로 성장해 가던 풋풋한 청년의 모습에서부터 대성공을 거두며 자신에 차 있는 당당한 모습 그리고 한 순간 몰락을 경험하며 깊어가는 고뇌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자화상까지 렘브란트가 남긴 몇몇 점의 자화상만 살펴보더라도 한 명의 거장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자취를 찬찬히 쫒아갈 수 있다.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17세기, 해상무역의 강자로 떠오른 네덜란드는 큰 부를 축적한다. 길드들은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최고의 미술가에게 작품을 의뢰하곤 했는데 1632년 암스테르담 외과의사협회는 아직 젊은 화가 렘브란트에게 단체 초상화를 의뢰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렘브란트의 걸작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이다.

렘브란트 이전의 화가들은 그림 속 인물들을 마치 개개인의 증명사진을 오려붙여 놓은 듯 경직된 모습으로 그렸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초상화에 연출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생동감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낸다. 배경은 연극 무대처럼 배치했고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 그림으로 스물여섯의 렘브란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부호들과 협동조합들은 앞다투어 청년 화가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큰 부와 명예를 쌓았다. 1634년 성공가도를 달리던 렘브란트는 베레모를 쓰고 고급 모피 외투를 두른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밝은 빛이 화가의 얼굴을 밝히고, 자신에 찬 매서운 눈빛으로 감상자들과 시선을 교환한다.

1640년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대가의 여유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열정의 시기가 지나고 본질을 꽤 뚫고 있는 그런 분위기의 자화상이다. 그림 속 화가가 오른 팔을 난간에 걸치며 여유로이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는데, 이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티치아노(1490∼1576)가 그린 ‘누빈 소매 옷을 입은 남성’(1515년경)의 초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정점에 올랐다는 것은 서서히 또한 기운이 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는 회화적 실험 정신이 렘브란트의 화가 인생을 내리막길로 안내하고 만다. 시민 민병대에서 의뢰한 단체 초상화가 문제였다. 1642년 폭이 4미터가 넘는 대작을 완성하고 의뢰인에게 건넸을 때 그 반응은 예상 밖으로 아주 부정적이었다. 민병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출동하는 절도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기대했을 텐데,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제각기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무질서함을 보이고 있다. 렘브란트는 연극적인 요소를 극대화해 자유분방한 화면을 구성하였지만, 의뢰인들의 기대에서 아주 벗어났던 것이다.

한 점의 그림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렘브란트는 한 점의 그림으로 가파른 내리막을 경험한다.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을 불렀는지 세 명의 자녀들이 세상을 떠났고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세가 기울었고 화가는 일순간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에는 의욕과 자신감이 넘쳐났고, 전성기 시절에는 고귀한 모습으로 자신을 그림에 담았다면 몰락을 경험한 노년기 렘브란트는 새로운 차원의 정신세계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자화상은 인물화의 한 종류로 미술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은 것을 이야기한다. 초상화가 그렇듯 화가의 자화상 또한 단순히 그려진 인물의 외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품과 내면 그리고 생의 단면들이 색과 선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며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킨다. /미술사학자 김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