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 포항예총 회장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

멀쩡하게 잘 자라던 ‘뱅갈고무나무’가 하나 둘 잎을 내리더니 급기야 남은 잎들도 비틀어지는 꼴이 심상치가 않아 식물원에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처방으로 영양제 한 봉지를 주며 계절도 좋고 하니 당분간 밖에다 두고 신선한 바람을 맞히라 하였다. 반신반의했다. 전문가의 의견이니 존중해야겠지만, 내심으로 절반은 믿기가 어려웠다. 전원으로 이사하고 나서, 지난 20여 년 간 잘 키우던 식물에게 자연의 햇살을 보여주고 좋은 공기를 마시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밖에 내놓았더니 불과 며칠 만에 죽어버린 것이 여럿이었고, 온실을 만들어 이번에는 잘 살겠거니 기대하며 두었다가 또 많은 식물을 죽게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온실 유리를 통한 따가운 햇살을 식물들이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집 안에서 키우던 식물이 죽는 일은 없었으니 선뜻 내놓기가 망설여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집안에서 이미 시들고 있는 고무나무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흔히 보던 알갱이 모양의 영양제를 화분위에 뿌리고 물을 흠뻑 준 다음 햇살과 그늘이 적당한 밖에 내놓았다. 그동안 날씨가 좋았고, 두 번의 비가 내렸으나 비를 맞게 그냥 두었다. 며칠 전부터 놀랍게도 비틀어졌던 잎들이 곧게 펴지고 새잎들이 나기 시작했다. 자연의 치유 능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의 질서를 헤아려 잘 적응할 수 있게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자연의 신비, 생명의 신비는 무한하다.

이기심이 많은 탓인지 모르겠으나, 평소 나 이외의 타인이나 동식물에 대하여 비교적 무심한 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지독한 어둠에 빠져있을 때, 나를 건진 건 사색을 통한 자경(自敬)이 아니라 언제나 자연이었고, 동식물이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언젠가도 지독한 회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식물과의 대화를 권하였다.

“식물과 얘기하세요. 그들은 당신의 말을 아주 잘 들어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함부로 옮기지도 않습니다.”

그때부터 아파트 베란다에 있던 식물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20여 년간 시시때때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해주며 보살펴서 한 포기의 식물도 죽이지 않았다.

식물에게 좋은 음악을 틀어주면 성장이 촉진되고 병충해에 저항력이 생겨서 튼튼하게 자란다. 식물학자들의 연구에서 해충이 클로버 잎을 뜯어먹자 다른 클로버들이 서로 경고하는 신호를 보내고, 해충이 싫어하는 물질을 배출하여 벌레를 물리치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하였다 한다. 그래서 식물도 지적생물체라 하는가 보다. 식물은 말을 못할 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난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

온 천지가 녹음으로 우거진 6월, 여전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대면활동이 편치 않다. 가까운 식물원이나 솔숲, 자연을 찾아 식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