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진<br>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
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식사하셨습니까?” 인사말이다. 밥 먹었냐고 묻는 말로 인사를 하는 나라가 몇 나라일까 싶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을 수 없던 시절엔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는 일이 제일 중요한 관심사이기에 인사말이 된 것이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프랑스 혁명의 초기 외침도 결국 원초적인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의 다름 아니다. 지금도 혁명정신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에서는 빵 값을 국가에서 관리한단다. 젊은 세대들은 이 인사말의 유래를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다. 배고픔과 같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밥만 먹고 사냐?’는 우스갯말이 생겨난 것을 보면 적어도 밥만 먹기 위한 경제 활동을 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기본적인 생존 위협에서 벗어나니 풍요로움 삶에 대한 욕구는 문화적 욕구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저기 취미활동이 풍성하다. 한 때 일부 상류사회에서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지던 테니스, 골프, 승마, 요트 같은 놀이가 대중화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골프채를 닦으며 부하 직원에게 지시하던 회장님만의 장난감이 웬만한 직장인은 물론 주부들도 주방의 국자 휘두르는 일처럼 일상화되었다. 중년 남자들이 삑소리를 무릅쓰고 굵직하게 내뱉는 저음의 부르스 곡 색소폰 연주(청중의 불안감은 내 알바 아니다)로 여심을 흔들고 싶어 한다. 헌팅캡을 삐딱하게 눌러쓴 채 긴 후드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를 향해 연신 카메라 샷을 눌리는 이는 아마추어 사진작가 반열이다. 유화 물감으로 캔버스 한 모퉁이를 알지 못할 형상의 덧칠을 하더니 붓끝을 왜 그리 열심히 보는지 이쯤 되면 피카소도 고개를 숙일만하지 않는가? 나무토막이 이유도 모른 채 끌 칼에 깎이고 톱에 잘리며 주인 잘 못 만난 탓을 하는 사이에 전문가 뺨치는 목공예 소품으로 만들어져 새 주인을 기다린다. 넘치고 넘치는 취미생활이다.

이쯤 되면 그 동안 들어간 비용 손익계산서를 들여다봄직하다. 가정경제를 꾸리는 주부의 찡그린 타박이 들려온다. 남정네의 과다한 관심영역을 채워주는 취미생활이 가계에 미치는 영향을 따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 학원비, 아파트관리비 등등. 기본 지출항목에 취미생활비용이 점점 잠식해 들어온다. “취미가 밥 먹여주느냐?”는 극언(?)이 뒤통수를 내리친다. 그동안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지쳐버린 내 영혼의 안식과 미래를 위해 재투자하는 충정을 이해 못하고 등 뒤로 던지는 비수에 급소를 맞는다. 여심을 흔들고 싶었던 악기연주도,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피카소를 소환하는 일도, 여인의 누드사진도 아니고 삶의 찐한 향기를 우려내려던 일생일대의 흑백사진도 찌든 삶의 아우성에 도로 다 물려야할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 말자. 잘 키운 취미 하나, 열 직장 안 부러운 시대다. SNS로 하는 취미생활 자랑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조회 수가 많아지면 돈을 준단다. 취미가 밥 먹여주고 때론 직업으로 변신하는 시대다. 마른하늘 적시겠다고 가정용 가습기 한 대 트는 일이 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밥 먹고 사는 방법이 다양해진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