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장사리’의 한 장면.

광복이후 미군이 진주한 38선 이남에서는 UN의 지원을 받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출범했다.

소련군이 진주한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세력이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해 10월부터 소련군 철군에 이어 1949년 6월 미군이 철군했다. 북한은 소련 및 중공과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하며 군비를 더욱 강화했다. 6·25남침 전에 이미 보병 10개 사단, 전차 1개 사단, 비행대 1개 사단을 확보했다. 남한의 정국은 정가의 파벌대립으로 불안했다. 각처에 확산된 자익의 준동과 게릴라의 파괴공작으로 치안확보에 국력이 크게 소모됐다.

육군은 1대의 전차도 없었고, 공군은 전투기 한 대 없이 20여대의 연습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1949년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크게 고무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북한에 막대한 무기를 지원했다. 김일성은 그의 지령에 따라 남침을 준비했다.

1950년 1월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방위선 밖에 있다”고 천명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에서 기습적으로 남침을 강행했다. 아무런 대비가 없던 국군은 불과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8월 초에는 대구 근교의 낙동강 선까지 후퇴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 국가의 UN군이 참전해 남한을 지원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해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다. 10월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해 국토통일을 눈앞에 뒀다. 이때 중공군이 개입했다. 유엔군과 국군은 한강 이남까지 후퇴했으나 공산군은 38선 이북으로 몰아냈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공산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돼 3년 1개월여에 걸쳤던 치열한 전투는 일단락됐다.

6·25전쟁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공산화되지 않았던 결정적 요인은 인천상륙작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영덕 장사 상륙작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 제766부대의 공격을 저지한 포항전투도 치열했다.

□ 장사상륙작전

학도병 772명으로 유격대 창설
일주일 전투 끝 100여 명 전사

6·25전쟁에서 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이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다. 그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의 하나가 1950년 9월 14일의 학도병에 의한 장사(영덕군 남정면) 상륙작전이었다.

1950년 8월 24일 대구를 중심으로 모집된 학도병 772명을 중심으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가 창설됐다. 대장은 이명흠 소령이었다. 그들은 간단한 훈련을 마친 뒤 9월 10일 장사동 상륙작전명령 제174호를 받아 700t급 LST 문산호(선장 황재중)에 승선하고 부산항을 출발해 장사로 향했다.

9월 14일 상륙작전이 개시되자 적군은 부경리(남정면) 200고지, 부흥리(남정면) 125고지에서 문산호를 향하여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5중대 부관 박계담 소위가 “돌격”이라 외치자 부대원들은 넘실대는 바다로 뛰어들어 장사 해안으로 상륙했다.

그들은 함포와 전폭기의 지원을 받으며 낮 12시경에는 고지를 장악했다. 밤이 되자 적은 4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해왔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1주일을 버티던 학도병들은 문산호가 좌초되고 수많은 동료가 전사한 상황에서 20일 부산항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다.

현지에는 상륙작전에서 산화한 학도병을 위해 위령탑이 건립됐으며, 1990년부터 매년 9월 위령제와 추모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 포항지구 전투

북한군 5·12사단 저지 방어전투
학도의용군 활약으로 탈환 성공

1950년 8월 10일부터 31일까지 포항지구에서 학도병, 국군 제3사단, 민부대(민기식 부대)가 북한군 5사단, 12사단, 제766부대의 공격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동해안지구 방어를 담당하던 국군 제3사단이 영덕과 강구지역에서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는 동안에 안동지역으로 남하한 북한군 제12사단이 8월 10일 포항 북쪽의 흥해를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군 제3사단의 퇴로가 차단되고 포항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포항시내에는 해군 경비부 요원 약 300명, 공군 포항기지부대 1개 중대, 경찰과 청년방위대 약 3천명이 있었고,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에 학도의용군 71명이 있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휘체계가 확립돼 있지 않았다.

8월 11일 증강된 연대규모의 북한군이 소티재(흥해~우현동 연결 고개)를 넘어 포항시내로 진입했다. 제3사단 후방지휘소는 학도의용군을 외곽에 배치하고, 행정병 60여 명을 통제해 학교 뒷산을 점령하게 하는 한편 일부 병력으로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했다.

학도병들은 스스로 2개 소대를 편성해 8월 11일 새벽 4시부터 11시간 동안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했다. 학도병들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 제3사단 요원들은 이미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됐으며, 13명이 포로가 됐다. 이와 같은 학도병들로 북한군의 포항시내 진출이 지연됨으로써 제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기관이 무사하게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포항이 피탈되자 육군본부는 8월 15일 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민부대(민기식 부대)를 영천에서 포항 방면으로 이동시켜 포항을 탈환하도록 했다. 17일에는 퇴로가 차단된 채 고립돼 있던 제3사단을 독석동에서 해상을 통해 구룡포로 철수시켰다.

민부대는 북한군이 유엔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고 포항 외곽의 야산지대로 숨어들자, 이 기회를 이용해 18일 포항 시내로 진입해 포항을 탈환하고 추격작전을 벌여 포항 북쪽의 진지들을 점령했다.

포항을 탈환한 다음날인 19일 구룡포로 철수해 부대정비를 마친 제3사단이 민부대와 임무를 교대했다. 제3사단과 북한군의 교전은 이어졌다. 북한군은 보급로가 끊기고 사상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양용주 전 포항시의회 의장은 “8월 11일 날이 밝자 영일(오천)비행장으로부터 F49기가 몇 대씩 편대를 지어 포항시내로 날아와 폭격과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폭탄은 ‘쇄’하는 날카롭고 섬뜩한 비행음을 내며 시내 곳곳에 떨어지고, 검은 연기와 불기둥이 여기저기 솟아올랐다. 간간히 총알과 포탄이 날아오는 가운데 아침의 동빈동 부두에서는 피난을 가려는 많은 시민들이 서로 먼저 배를 타려고 매달리고 물에 떨어지는 등 아수라장이었다”고 회고한 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박윤식기자

 

    박윤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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