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에서 문학적 상상력 키운 성석제 <상>

성석제의 책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1994년 짧은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성석제는 근대소설의 서사적 틀을 갱신해 온 작가로 이름이 높다. 구술적 특성의 복원과 동양 서사 전통의 활용을 통해 그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해왔던 것이다. 또한 그는 ‘소설은 새로운 성격창조’라는 소설원론의 가장 충실한 실천자이기도 하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이전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되기 힘든 술꾼, 노름꾼, 깡패, 바보, 건달, 탐서가 등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광기와 자기 세계에만 집중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방외인(方外人)들로서, 소설적 재미와 감동의 근원이 되고는 하였다. 성석제가 거둔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은척’으로 대표되는 경북 상주를 적극적으로 소설 속에 끌어들인 것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성석제는 1995년 여름에 첫 번째 장편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상주에 있는 오태저수지 못가 마을인 오대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시절에 있었던, 느꼈던, 보고 들었던 일들이 소설로 여러 편 태어났다”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

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

동네 사람들에 의해 “바보”로 불리는 황만근은 천하게 취급받는 인간 모멸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것에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가치를 추구하여 나름의 완성에 이른 것이다. 어쩌면 황만근은 기존의 질서 속에서 배제되고 외면 받았기에,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석제는 1960년 7월 5일 경북 상주군 상주읍 개운리 대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5년 3월 26일 서울시 영등포구 가리봉동으로 이주할 때까지, 만 14년 8개월 20일 정도를 상주에서 살았다. 모든 이에게 유년 시절을 보낸 공간이 그러하듯이, 성석제에게도 상주는 매우 각별한 곳이다. 그는 “상주를 거치지 않고는 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았다. 상주는 내 소설에 있어서 삼손의 머리카락이거나, 우렁각시가 살고 있는 항아리였다.”(영남일보, 2010.5.24)고 고백할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중에서 절반 이상이 상주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성석제에게 상주가 얼마나 각별한 공간인지를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0) 역시 상주와의 인연이 깊은 작품이다. 성석제는 1995년 여름에 첫 번째 장편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상주에 있는 오태저수지 못가 마을인 오대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시절에 있었던, 느꼈던, 보고 들었던 일들이 소설로 여러 편 태어났다”(영남일보, 2010.5.31)며, 구체적인 작품으로 ‘도망자 이치도’, ‘당부 말씀’과 더불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들고 있다. 또한 성석제는 한때 상주 내지는 경북 북부의 방언을 애써 소설에 담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으며, 그러한 시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작가의 고백에 따른다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는 직접적으로 경북 상주라는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은 상주의 지역성과 언어가 직접적으로 배어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인물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기록하는 전통적 서사양식 전(傳)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황만근을 신대 1리의 사람들은 “바보”라 여긴다. 이 마을에서 황만근이 차지하는 위상은 노래를 부르는 마을 사람들의 대체 경험과 정서가 녹아 있는 황만근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노래에서 황만근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백분(번), 찝원(십원), 여끈(열 근), 팔푼, 두 바리(마리)”인데, 여기에는 황만근의 바보같은 특징이 압축되어 있다. ‘백번’은 황만근이 땅바닥에 넘어진 횟수이자 황만근이 셀 수 있는 가장 큰 단위이고, ‘찝원’은 혀가 짧은 황만근이 십원을 발음한 소리이며, ‘여끈’은 동네 사람들이 아들의 몸무게를 물어볼 때 대답한 말이고, ‘팔푼’은 황만근이 여덟 달 만에 태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두 바리’는 황만근이 우체부에게 가족의 숫자를 말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한 실수나 바보짓도 늘 황만근에게 가탁해서 그를 점점 더 바보”로 만들어갔다. 거기다 마을 사람들은 “반근아, 너는 우리 동네 아이고 어데 인정없는 대처 읍내 같은 데 갔으마 진작에 굶어죽어도 죽었다. 암만 바보라도 고마와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라는 공치사를 늘어놓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업신여김과 달리, 신대 1리는 황만근의 덕으로 유지되는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만근이 마을에서 사라진 지 하루만에 마을 사람들은 애타게 그를 찾을 정도로, 황만근의 역할은 크다. 염습, 산역, 똥구덩이 파는 일, 벽돌을 찍는 일, 풀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처럼 “동네의 일, 남의 일, 궂은 일”은 황만근이 도맡아서 처리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황만근은 마을 어른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황만근의 처사는 “공평무사”하여, 마을 사람들이 시비를 물으러 가면 “언제나 공평무사한 자연의 이법에 대해 깨우치게 되고 분쟁은 종식”되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에 의해 “바보”로 불리는 황만근은 천하게 취급받는 인간 모멸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것에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가치를 추구하여 나름의 완성에 이른 것이다. 어쩌면 황만근은 기존의 질서 속에서 배제되고 외면 받았기에,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황만근의 모습은 ‘장자(莊子)’의 ‘덕충부(德充符)’에 나오는 지인(至人)들을 연상시킨다. 장자는 ‘덕충부’에서 왕태(王<99D8>), 신도가(申徒嘉), 숙산무지(叔山無趾), 애태타(哀<99D8><5B83>)처럼 장애가 있는 이들을 그린다. 이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유사한데, 대표적으로 왕태를 살펴보면 그는 발이 잘렸지만 말로 하지 않는 교육을 행하며, 은연중에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그렇기에 공자까지도 “천하를 모두 이끌어 그를 따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완성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외양의 모자람에 자포자기하지 않으며, 육체 이상의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한 결과 숭고한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정신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다.(‘장자’, 德充符편, 이석호 역, 삼성출판사, 1976, 225-235면) 장자는 장애가 있지만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물들을 통해 “덕이 훌륭하면 육체적 불구는 잊혀진다.”(德有所長而形有所忘)(위의 책, 233면)는 것을 보여주고 한 것이다. 황만근 역시 ‘덕충부’에 등장하는 지인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마을 대부분의 집이 6·25 직후에 지어진 신대 1리는 더 이상 황만근과 같은 지인(至人)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신대 1리는 이미 탐욕과 무례로 속속들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산업화 시대 이후의 농촌 배경 소설들이 보여주던 노스탤지어의 렌즈를 통해 낭만화 된 농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심지어 ‘고향의 고향’, 혹은 ‘장소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가족마저 따뜻한 삶의 공간이 아니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나 아들도 황만근을 “반쪽” 또는 “싸래기”로 취급하며, 황만근은 온갖 집안일을 정성스럽게 다하면서도 상도 없이 밥을 먹고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노비처럼 살아간다.

또한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대회’에 나가기 전날, 황만근이 민씨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 마을이 얼마나 이기심과 자본의 논리에 깊이 빠져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황만근은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 카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제 돈으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빚을 지게 되고 농사가 놀음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또한 농민에게 빚을 주는 사람이나 기관은 모두 농사꾼을 나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자신은 “바보”라고 아무도 빚을 주지도 않고, 보증을 서라고 하지도 않았다고 울분을 토한다. 그러면서 황만근은 민씨에게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황만근은 백 년은 커녕, 반백년의 삶도 살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는다. 황만근은 마을 이장의 말에 따라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객사하는 것이다. 이장은 투쟁 방침에 따라 경운기를 몰고 총궐기대회에 참석하라고 했는데, 이 투쟁방침을 황만근만 곧이곧대로 실천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아이러니는 신대 1리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빚이 없는 황만근만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죽는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예의와 염치는 사라지고 고삐가 풀린 탐욕만이 가득한 이 마을에서 2000년 전 ‘덕충부’ 속 인물의 화신이자, 토끼와 밤새 대결을 벌이기도 하는 황만근이 자신의 천수를 누린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씨는 황만근을 바보가 아닌 “황선생”이라 지칭하며,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 세운 사람이 아니랴.”라는 존엄한 문장으로 끝나는 묘비명(墓碑銘)을 바쳐 황만근의 넋을 위로한다. ‘성자가 된 바보’, 황만근의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라는 호언이 실현되는 세상 역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고향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

 

작가 성석제는

풍자와 해학, 그리고 웃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삶의 다양한 층위를 문학적으로 해석한 성석제는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법학과에서 공부했고, 문예지 ‘문학사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삶의 근원과 존재의 근본에 대한 탐구를 시종 지속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새가 되었네’ ‘궁전의 새’ ‘호랑이를 봤다’ 등을 출간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