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로운 돌이 연못 가득한 서석지.

영양은 경북에서는 오지 중에 오지이다. 육지 속에 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첩첩산중이다. 예전엔 포항에서 가려면 3시간은 걸리니 쉽게 나설 수 없는 곳이었지만 영덕상주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1시간 정도면 도착하니 옆 마을이 된 듯하다. 한걸음에 달려갔다.

전국에서 가장 공기가 깨끗하고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가는 곳마다 경치 좋은 명승지요, 그 속에 품고 있는 문화재도 많다. 산이 깊으면 물이 많은 것인지 차를 타고 달리는 내내 어디나 내가 흐르고 내에 엎드려 다슬기를 잡는 어르신들이 눈에 뜨였다.

오지라 해도 역사가 깊은 곳이다. 신라 때 고은(古隱)이라 불렀으며, 고구려 장수왕 때 잠깐 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신라에게 돌아왔고 이후 영양(英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조선시대 대표 정원인 서석지다. 오래전에 찾았을 때에는 없던 주차장이 생겼고, 담장을 새로 단장하는지 7월 2일까지 ‘공사 중’이라는 팻말이 섰다. 그래도 아쉬워 잠시 들어가 봐도 되냐고 물으니 포클레인이 길을 비켜주었다.

들어가는 문이 옆으로 놓였다. 왜 이렇게 돌아가게 해 놓았는지는 마당에 들어서면 알게 된다. 마당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다. 마당 전체가 연못이니 말이다. 마당이 없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연못의 풍경에 또 놀라게 된다. 여름에 가면 분홍빛 진한 연꽃이 만발해 이 동네가 연꽃을 심은 연못이라는 ‘연당리’라고 이름 붙여진 연유를 알게 된다.

반변천 지류의 개울을 이용해 물을 끌어들이고 자연석의 오묘함을 최대한으로 살려 지은 집이다. 근처의 풍광을 외원으로 삼아 조선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넓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멀리 있는 보길도 세연정과 담양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에 들어가는 서석지, 광해군 때 정영방이라는 사람이 만든 조선 전통 정원으로 중요 민속 문화재 제108호이다.

정원 풍경의 압권은 400년이 훨씬 넘게 이곳을 지킨 은행나무다. 아마도 서석지 역사와 함께 했을 것이다. 담장에 기댄 가지들은 담을 벗어나 마을 입구에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의젓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하늘을 향해 팔을 뻗은 품새다. 벌어진 가지에 은행 알이 떨어져 싹을 틔워 나무에 어린 나무가 자랐다. 자식을 품은 어미의 모습이다. 여름에는 연꽃을 보러 가고 가을에는 금빛 찬란한 은행나무를 보러 이곳에 가야한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은행나무를 돌아 연못 북쪽에 자리한 주일재(主一齋, 서재) 앞에 선다. 네모난 단을 만들어 매화(梅),소나무(松),국화(菊),대나무(竹)를 심어 벗하였다. 사우단(四友壇)이다.

‘매란국죽’이라 하여 사군자를 뜻할 텐데 난 대신 소나무를 심어 ‘매송국죽’이 되었다. 또한 서석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 있으니 바로 연못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위 같은 돌(瑞石)이다. 울퉁불퉁 솟아난 60여개의 서석들은 때로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여 오묘한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상서로운 돌이란 뜻으로 정자의 이름이 되었다. 서석지의 주인공이다. 저마다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연못의 물은 북동쪽 귀퉁이로 흘러 들어와 남서쪽으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연못을 한 바퀴 돌면서 감상하고 이제 경정이라는 현판이 있는 정자에 올라 가 본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 경치가 달리 보인다. 경정(敬亭)의 경은 성리학의 처음과 끝이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고 가지런히 하는 것이 경이라고 한다.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시원한 마음이 절로 든다. 몇 해 전 이곳에 올라 지인들과 두런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서늘한 바람과 함께 소나기가 닥쳐왔다. 유월의 한낮의 뜨거움을 식히고 사라진 소나기로 주위가 더 고요해져 마루에 누워 한나절을 즐겼었다.

오래된 건물에 들어가는 일은 타임머신을 타는 일이다. 시간은 다르지만 경정에서 글을 읽고 제자를 키우던 주인의 숨결을 느끼며 나도 한순간 조선의 선비가 되어본다. 낭랑한 시 읊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