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옥수필가
윤순옥
수필가

봄맞이 행사를 하는 동네 꽃집에서 화초를 골라보았다. 욕심을 내다보니 주인이 끼워준 꽃까지 합해 열 개가 넘었다. 발렌타인자스민, 스투키, 산세베리아, 크로톤 등 이름표 하나씩을 달고 꽃집 직원 품에 안겨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설레고 반가웠다.

새 식구를 들이면서 베란다 터줏대감들을 구석으로 밀어냈다. 봄이 다 가도록 연분홍 꽃을 피우던 삼단 철쭉, 노르스름한 줄이 예뻐 자꾸 눈이 가던 관음죽, 한결같은 모습에 내가 특히 좋아하는 군자란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로 들인 화초에 정성을 쏟느라 하루가 바빴다. 아침저녁으로 물때를 살피고 햇빛을 쫓아 베란다에 들락거렸다. 그 때문인지 홍콩야자는 잎이 풍성해지고, 꽃기린, 제라늄도 꽃망울을 터뜨려 내 애정에 보답했다. 새 식물에 전념하는 사이 구석으로 밀려난 화초에 차츰 물주는 일도 잊었다. 햇빛 한 줌이 귀해도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었다. 주인의 홀대에도 오래 된 화초들은 제 빛을 내고 있었다. 피울 꽃은 피우고 키울 잎은 키웠다. 아차! 싶었다. 새 화초를 보는 즐거움에 빠져 그것들에 소홀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호스가 꿀렁거렸고 줄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에 막힌 것이 터지듯 시원했다. 그동안의 일을 만회라도 하듯 옛 화초에 오래 물을 주었다. 물줄기에 군자란 잎이 흔들리자 잎과 잎 사이에 희끗한 것이 드러났다. 꽃대였다. 꽃망울을 만들기 시작한 어린 꽃대가 숨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주황색 탐스러운 봄을 안겨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꽃망울을 보니 더욱 미안하고 감격스러웠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슬렀다. 호들갑스러운 내 모습과 달리 언제나 조용히 꽃대를 피어 올리는 군자란은 과연 이름값을 하고도 남았다.

화분 배치를 새로이 했다. 화분 끄는 소리, 낑낑대며 내 뱉는 거친 내 숨소리까지 겹쳐 시끄러웠다. 식생이 비슷한 종류별로 자리이동이 끝나자 비로소 모두 제자리에 든 듯하였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해 보였다.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마음 따로 몸 따로 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진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전기 포트에 적당량 물을 붓고 끓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사람의 일이라고 다를까. 오래 알던 사람을 군자란 밀어내듯 했더라면, 상황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식물을 두고 마음 쓰는 나에게 또 한마디 던질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균형이 깨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라, 걷잡을 수 없이 흘러 되돌릴 기회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겠는가. 생각에 잠기는 동안 전기 포트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원영 스님의 책 ‘삶이 지금 어딜 가느냐고 불러 세웠다’를 손에서 놓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즈음 나는 바쁜 일상에 쫓겨 방향도 목적지도 잊은 채 달리고 있었다. 그때 만난 책 한 권이 멈추면 안 될 것 같던 나를 멈추게 했다. 한두 번 보고 들은 말이 아니었을 텐데 ‘삶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 멈칫했다.

책 읽기를 멈추고 나를 보았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내 모습과 마주했다. 욕심에서 비롯된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래 전부터 해왔던 과외 일을 줄이는 것이었다. 학생들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고 새 일을 하면서도 붙들고 살았다.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 둘 내려놓기 시작하면서 진짜 소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삶의 지혜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닌가 보다. 지혜를 얻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새로운 것에 눈이 팔려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진 않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다시 가져봐야겠다.

어느새 봄도 지나고 초여름 햇살이 베란다에 가득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