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 낳은 인물 최무선

최무선과학관에 전시된 현자총통과 차대전.
최무선과학관에 전시된 현자총통과 차대전.

무기화된 화약의 연구·개발로 300년 이상 이어지던 왜구의 노략질과 횡포를 막아내 고려의 백성들로부터 칭송받았던 최무선(1325~1395).

영천시가 내세워 알리고 싶은 ‘지역의 대표 인물’ 중 한 명인 그가 전투에 나섰을 때 나이는 50대 중후반. 지금과 달리 고려시대엔 회갑을 앞둔 사람이라면 노인 대접을 받았다.

그럼에도 일생을 매달린 화약 개발에 대한 에너지와 열정을 왜구와의 싸움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줬다. 최무선은 청년의 심장으로 평생을 살았던 과학자이자 장군이었던 것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무렵인 14세기 후반. 왜구의 잦은 침탈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악재 중 악재였다. 그 당시의 상황을 군산대 유호석 강사는 이렇게 요약한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과 수군력의 강화’라는 논문을 통해서다.

전투용 화약 제조하는 화통도감 설립 주도

화통·화전 등 다양한 수군 무기 제조 성과

100척 배로 500여 왜구 전투선 궤멸한

1380년 진포해전은 함포 발사 최초의 사례

3년 뒤 관음포해전 승리는 대마도 정벌 이끌기도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화약 관련 지식·노하우로

아들 최해산은 화차까지 발명하는 공 세워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

“고려 말기 왜구의 침입은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아주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미 고종대부터 경상도 남해안에 그 모습을 드러낸 왜구들은 이후 충정왕대를 거치면서부터는 거의 매년 빠트리지 않고 연안과 주현(州縣·지방 행정구역 단위) 지역은 물론 내륙 깊숙이까지 쳐들어왔다. 원나라의 오랜 간섭과 압력을 받은 데 이어 원·명 교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국내적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던 고려에게 왜구의 거센 침입은 더 큰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으며, 결국은 새로운 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되었다.…(중략) 사실 ‘고려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왜구 침탈에 관한 것들은 고려군의 패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화약 무기와 강화된 수군(水軍)으로 이룬 승리

이처럼 매번 열세였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둔 1380년 진포해전(鎭浦海戰)은 전쟁사에 기록될 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최무선과 심덕부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한 이 싸움에서 고려의 수군은 겨우 100척의 배로 왜구의 전투선 500여 척을 궤멸시킨다.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그것을 재료로 만든 각종 화포였다. 이는 해상을 무대로 하는 전투에서 함포(艦砲·배에서 쏘는 화포)가 발사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육지로 도망치는 왜구를 뒤쫓아 섬멸한 것이 이성계(1335~1408·조선의 태조)라는 것도 흥미롭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이날 조선 수군이 화포 무기로 이룬 승리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며, 드디어 언덕에 올라 각 주(州)·군(郡)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땅에 쏟아진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 최무선·심덕부·나세 등이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를 써서 그 배들을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 적이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 또한 많았다. 오직 330여 명만이 겨우 도망을 갔다.”

 

최무선과학관 입구엔 ‘고려 화포과학의 태두 최무선 선생’이라 적힌 조형물이 서있다.
최무선과학관 입구엔 ‘고려 화포과학의 태두 최무선 선생’이라 적힌 조형물이 서있다.

이로부터 3년 뒤에도 최무선은 다시 전장에 선다. “지난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남해의 관음포 인근 바다로 쳐들어온 왜구를 거듭 무력화시키며 승리를 이루니 이를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이라 부른다.

1383년 초여름 관음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왜구의 전함 120척은 지금의 창원 지역으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맞선 고려 수군의 주요 무기는 재론할 것도 없이 화포. 화포 운영의 총책임자는 이번에도 최무선이었다.

최무선과 함께 전투를 지휘한 장군들은 “왜구와의 싸움에서 이처럼 통쾌하고 크게 이긴 적이 있었던가”라며 승전의 기쁨을 나누었다고 한다.

관음포대첩은 고려 수군에게 “우리도 이제 왜구가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으며, 이런 기세는 왜구의 근거지를 공격하는 대마도 정벌로까지 이어졌다.

 

최무선 영상체험관.
최무선 영상체험관.

◆ 우리나라 수군의 신병기가 된 무기들

최무선의 가장 큰 업적은 화약의 무기화를 이끌었고, 화통도감(火通都監)의 설립을 주도해 전투에서 사용될 화약을 제조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각종 화포를 만들어 과학을 통한 국방력 강화에도 앞장섰다.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이 최무선의 아이디어와 기술력 아래서 탄생한 고려 수군의 무기들이다. 제작된 화포는 앞서 언급한 진포해전과 관음포대첩 등에서 왜구를 공포로 몰고 갔다. 현대전에서 사용되는 스마트 미사일과 스텔스 전투기의 역할을 이미 7세기 전에 해낸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걸쳐 예문관에서 문신으로 활동한 정이오는 ‘화약고기(火藥庫記)’라는 책에서 “우왕대의 진포해전과 남해의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왜구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통과 화포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최무선이 개발에 기여한 무기 중 화전(火箭)은 조선시대 때까지 널리 사용됐던 불을 붙인 화살 형태의 무기다.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새의 깃털로 장식했다.

주화(走火)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사용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형 화기로 불린다.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외부의 물리적 영향 없이 스스로 발사되는 무기였다. 또한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신기전(神機箭)의 전신이기도 하다.

주화에 관한 기록은 ‘태조실록’에도 쓰여 있다.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화통도감이 세워진 1377년에서 1392년경으로 추정된다. 다만 화살이 곧게 나가지 못하고 사용되는 화약의 양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것은 약점으로 지적됐다.

조선시대 황자총통에서 사용되던 피령전(皮翎箭)은 벌목한 지 2년이 된 나무로 제작했다, 위와 아래가 모두 철로 장식됐고, 화살 끝에는 철촉을 끼운 것으로 알려졌다. 사거리가 1천100보에 이르는 당시로선 치명적인 무기였다.

철탄자(鐵彈子) 역시 화포에 넣어 발사하던 무쇠로 만든 탄알이다. 고려 후기에 발명됐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속적으로 연구가 이뤄진 무기다.

최무선 집안은 대를 이어 화약 무기의 연구와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1380~1443)은 아버지가 왜구와의 전투에 최초로 나아가 승리를 거둔 해에 태어났다. 그는 1401년 화약무기 담담자로 관청 근무를 시작한다.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화약 관련 지식과 노하우는 그를 ‘주목받는 젊은 화약 연구개발자’로 성장시켰다.

최해산은 화약 제조를 담당하며 주목할 만한 공을 세웠으니, 바로 무기용 화약의 성능을 진일보시킨 것이다. 더불어 전투에서 큰 역할을 담당할 화차도 발명했다. 1407년 겨울. 고성능 화약을 새로 만들어 선보인 최해산은 폭발 실험장에 참석한 일본의 사신들을 놀라게 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왕에게 상까지 받게 된다.

화약 무기 개발에 나섰던 시점부터 오랫동안 화약 관련 기술을 독점했던 최해산은 각 지방에서도 염초를 제조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그 위상이 다소 낮아졌다는 평가다. 하지만,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나라의 국방력 강화에 작지 않은 몫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최무선과학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어린이들.
최무선과학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어린이들.

◆ 최무선의 애국심 이어갈 ‘최무선과학관’

영천시 금호읍 널찍한 터에 조성된 최무선과학관은 최무선의 생애와 그가 과학 기술과 고려의 국방에 기여한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개발하고, 화포를 사용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으며, 후대의 화약 관련 기술 발전에 기여한 최무선 장군을 기념하고,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에게 기초과학을 체험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영천시의 설명.

과학관과 더불어 영상체험관, 야외공연장 등을 갖춘 이 시설은 많은 학생들과 관광객이 찾아와 최무선의 행적을 살피고, 과학 기술을 통한 나라 사랑의 실천을 고민하는 공간이다. 영천을 찾는다면 꼭 한 번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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