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선한 사람들과 만난 운 좋은 여행

암스테르담은 운하의 도시다. 걷다보면 수많은 다리를 만나고 수로를 따라 배가 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은 운하의 도시다. 걷다보면 수많은 다리를 만나고 수로를 따라 배가 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그렇게 펄펄 끓던 날씨가 갑자기 초가을 날씨처럼 바뀌었다. 벨기에를 넘어오며 쌀쌀한 바람이 불어 비옷을 껴입었다. 이탈리아부터 프랑스까진 고속도로 통행료를 냈는데 벨기에도 네덜란드도 톨게이트가 따로 없었다.

파리에서 릴까지(약 230킬로미터) 통행료가 18.5유로. 파리에서 암스테르담까진 약 540킬로미터다. 팜플로나에서 여기까지 프랑스를 지나오는 동안 정확하진 않지만 통행료로 10만원 훨씬 넘게 쓴 듯하다. 유럽은 각 나라마다 톨게이트를 지날 때 통행료를 내거나 통행증인 비넷을 구입해야 하는 곳도 있고 아예 무료인 곳도 있다. 비넷을 구입해야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은 통행료를 내야 한다.

체코 프라하에서 유심카드를 산 이후 더는 유심카드를 구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했는데 미리 지도를 다운받아두고 고속도로 휴게소와 숙소에서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니 딱히 더는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아예 국내에서 사용하던 전화는 정지시켰고 사용하던 휴대폰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장나는 바람에 휴대폰 인증이나 인증서가 필요한 모든 정보에서 차단된 상태. 페이스북과 메신저 그리고 카카오톡으로 몇몇 사람들과 연락만 가능하다. 그래도 별 일 없이 두 달이 지났다.

급하고 중요하다 싶은 일도 막상 멀찍이 떨어져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고, 그리 급하지 않은 일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당장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룻밤 묵어갈 곳과 내일도 집으로 향해 갈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달리면 달릴수록 단순해지고 있달까.(원래 단순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오토바이 여행의 좋은 점은 복잡한 생각의 잔가지를 모두 쳐낼 수 있다는 거다. 복잡하고 위험한 곳일수록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다고 이 집중력이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로시에서 내리는 순간 끊기듯 풀린다. 파리에서 벗어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나치가 암스테르담을 점령했을 당시 안네 프랑크 가족이 숨어 살았던 집.
나치가 암스테르담을 점령했을 당시 안네 프랑크 가족이 숨어 살았던 집.

◇ 암스테르담의 세련된 예술서 전문서점 ‘멘도’

덥지도 춥지도 않고 걸어다니기 딱 좋은 날씨. 암스테르담은 오밀조밀한 시가지를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많고 시 외곽까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어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탔으면 더 좋았을 걸 후회했다. 시내로 나가기 위해 지하철 타러 갔다 실수를 했다. 지하철 승차권을 사야했는데 기차 승차권을 사서 기차를 탈 뻔 했다. 왕복 승차권이 6유로가 넘어 네덜란드는 지하철비도 비싸구나 놀랐는데 플랫폼에서 기다리며 아무래도 이상해 곁에 선 반짝이는 초록색 눈을 가진 아가씨에게 “센터럴 스테이션 가는 거 맞나요?” 물었다.

여긴 기차를 타는 곳이고 지하철은 입구가 반대쪽에 있고 거기서 승차권을 사야 한다고….

관광하러 왔다면 1일 승차권(8유로)을 사는 것이 좋다고도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가 헤맬 것을 염려해선지 지하철 승차권 사는 곳 출구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쉽게도 안네 프랑크의 집도 반 고흐 미술관도 보지 못했다. 예약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하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평일인데 뭐 사람이 많을까 싶었다.

 

암스테르담은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돼 있고, 자전거를 일상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시민들이 많다.
암스테르담은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돼 있고, 자전거를 일상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시민들이 많다.

이번 주는 물론이고 다음 주까지도 예약이 밀려있었다. 결국 안네 프랑크의 집 외관만 보고 왔다. 입구에 길게 줄을 서 있는 걸 보고 한숨만. 유럽도 방학과 휴가철이 겹쳐 어딜 가나 이름난 곳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곳에서도 중국 관광객이 많았다.

안네의 집 근처에 있는 서점을 찾아다녔다. 내부가 온통 검은 색인 예술서를 파는 멘도 서점과 주변 서점들을 구경했다. 멘도는 외부 진열장부터 세련미가 넘쳤다.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테리어와 책을 전시하는 방식이 훌륭했다. 예술서만 취급하고 있는 것도 좋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서점 중에 가장 자신의 ‘색깔’이 확실한 곳으로 꼽아야겠다.

책 욕심을 버리기도 힘들고 헌책방이니 책을 가릴 처지가 아니지만 만약 새 책으로 한 가지 분야만 집중한다면 멘도 같은 서점이면 좋겠다 싶다. 거리엔 사람들이 많았지만 멘도 서점엔 나를 포함해 손님이 딱 두 명이었다. 주변 다른 곳도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포르투의 ‘렐루 서점’나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처럼 역사를 가지고 영화에 나오거나 유명 작가와 관련이 있지 않으면 책 팔기는 어디든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여유만 있다면 사고 싶은 사진집이 많았으나... 책 욕심은 이제 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처지에 책 욕심이라니. 돌아가면 최대한 책을 줄이겠다고 마음먹은 터인데 멋진 책을 보면 그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한다.

휴스 마르세유 사진 박물관에 들러 디나 로손과 엘스페스 디에드릭스의 사진전을 보고 왔다. 두 사람 모두 여성 사진가다. 디나 로손은 자신이 만난 흑인들을 담은, 엘스페스 디에드릭스는 바다 밑 생물을 촬영한 작품. 휴스 마르세유 박물관 건물은 17세기 지어졌고 4층까지 아주 많은 방이 있었다. 전혀 색깔이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을 방마다 교차 전시해 좋았다. 여행 중에 사진 전시를 여럿 보았는데 단순히 사진만 전시하는 경우는 없었다. 영상과 오브제, 작품과 관련 있는 작은 수집품까지 함께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진 ‘전시’가 작품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것도 중요하구나 깨달았달까. 이게 트렌드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전시를 구성하는 기획자의 능력이 중요한 거겠지.

예술서 전문서점 ‘멘도 서점’. 주변에 여러 서점과 갤러리, 박물관이 있다.
예술서 전문서점 ‘멘도 서점’. 주변에 여러 서점과 갤러리, 박물관이 있다.

◇ 예의바른 젊은 친구들과 같은 방에서 지내다

어느 숙소에서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 함께 방을 쓰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금살금 샤워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덥수룩한 머리는 그 사이 흰머리가 더 는 듯하고 수염도 깎지 않은 지 오래라 딱 집에서 쫓겨난 중년 남자 행색이다.

암스테르담 숙소는 한 방에 침대가 8개인데 단체여행 온 젊은이들로 북적북적. 2박 3일 동안 어디 전쟁터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내가 없었다면 밤새 이야기하고 놀았을 텐데 나를 배려해선지 머리맡 전등을 끄면 다들 조용히 취침 준비를 했다. 가끔 이런 상황을 만나면 이제 도미토리에서 젊은이들과 같이 방을 쓸 나이는 아니구나 싶다. 형편에 따라 숙소를 정하지만 이렇게 젊은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쳐서야….

 

휴스 마르세유 사진박물관 1층엔 사진책만 다루는 서점이 있다.
휴스 마르세유 사진박물관 1층엔 사진책만 다루는 서점이 있다.

함부르크로 향하는 중에 휴게소에서 데이비드 아저씨 부부를 만났다. 파리에 사시는데 바르샤바로 여행 가는 중에 주차해둔 로시를 보고 이야기를 건네셨다. 부인 크리스틴 아주머니의 친척이 대한항공에서 파일럿으로 일하고 있어 서울에도 다녀왔단다. 아저씨는 혼다 골드윙을 타는 라이더라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토바이로 왔다니 “허리는 괜찮나?” 걱정부터 하셨다. 허리보다는 계속 빛을 보고 달리니 눈이 항상 피로해서 문제다.

헤어지고 다시 달리다 잠시 쉬기 위해 휴게소에 들어갔더니 마중 나온 것처럼 데이비드 아저씨가 주차장에서 내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내가 가는 걸 우연히 다시 보고 따라 들어왔다고.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서울에 오거나 파리에 갈 일이 있으면 연락하기로. 이번 여행에서 단 한 명도 악한 이를 만나지 못했다. 복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