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촉석루 삼 장사’ 메아리치는 퇴계 이황 제자 학봉 김성일 종택

학봉종택(학봉선생구려) 대문 입구.

학봉 김성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임진왜란과 학봉은 피와 살 같이 붙어다니는 인연의 원죄로 고통스런 아픔이다.

의성 김씨 문중의 입장에서는 퇴계학을 정통으로 받은 긍지이고 자랑스러운 선조이다. 퇴계와 서애, 학봉은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는 안동의 3대 스타이다. 이 학봉종택은 지금의 자리에 있다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1762년 학봉종택을 옮겼던 소계서당.
1762년 학봉종택을 옮겼던 소계서당.

#. 임진왜란과 학봉 김성일

1592년 4월13일 20여 만 명의 왜군이(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700여 척의 배에 1만8천 명) 부산에 상륙한다. 부산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김해를 거처 서울로 진격하고, 최강성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 경주를 거쳐 북상한다. 조선은 명장 신립장군을 믿었으나 충주 탄금대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전멸했다. 불과 2주일 만인 5월 2일에 서울을 점령한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가 명나라에 망명을 타진한다. 성난 백성들은 왜군이 오기 전에 제일 먼저 노비문서가 있는 장예원과 형조건물을 불태우면서 경복궁이 사라진다.

1590년 일본은 100년의 혼란한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국가를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66주를 통치하는 실질적인 왕(관백)이었다. 평화기가 되면 싸움이 전공인 무사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 새로운 싸움터가 조선이었다. 공공연히 명나라와 조선을 치겠다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려온다.

쓰시마(對馬島)도주가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1590년 3월6일(음)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허균의 형)과 200여 명의 조선 통신사는 대마도를 거처 일본으로 간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1월에야 도요토미를 만나고 근 1년만인 1591년 2월(음력)에 부산에 도착한다. 이들이 가져온 국서도 무례한 말투로 ‘정명가도(征明假道)’로 침략의 뜻이 분명히 들어있었다.

 

학봉종택과 잔디 깔린 마당.
학봉종택과 잔디 깔린 마당.

선조 앞에서 황윤길은 미리 올린 보고서와 같이 바닷가에 배가 수백 척이나 있는 것을 보았고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사 김성일은 민심을 동요시키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절대 침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동인인 허성도 침략해온다 했다.

선조는 워낙 상반된 견해라 도요토미의 생김새를 묻는다.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했고, 학봉은 “생김새는 쥐 같고 원숭이처럼 작고 못 생겨서 우리나라를 침략할 위인이 못된다”고 격하하였다. 결국 당시 실권을 쥔 동인의 의견대로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정여립(동인)과 관련되는 모든 사람 1천 여 명을 죽여 버린다. 이때 실각해있던 서인 정철이 총 취조관이 되어 조선인재 대부분(동인)이 죽음을 당해 임진왜란 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원인도 되었다. 술 좋아하며 관동별곡, 장진주사 등의 글로 국문학적으로는 한 획을 그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과 서인들의 권력을 위한 악랄한 사람이다. 통신사가 떠날 때는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가 정철이 선조의 후궁의 아들 광해군을 후계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동인이 집권여당 되어 있어 논란 끝에 동인 김성일의 주장이 채택되어 적극적인 방비가 없었다.

전쟁이 나자 선조는 황윤길의 의견을 무시한 것을 후회하고 잘못 보고한 김성일을 파직하고 죽이려 하자 영의정 유성룡은 “지금 죽이나 나중에 죽이나 차이가 없다. 차라리 김성일에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여 경상도 초유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관군을 지휘하여 1차 진주성을 지켜냈으나 2차전을 앞두고 관사에서 병사했다.

2019년에 그린 학봉 김성일 초상화.
2019년에 그린 학봉 김성일 초상화.

#. 전쟁의 상처와 치욕의 승리. 학봉의 얼굴

임진왜란 7년 동안 왜군이 분탕질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여 우리가 승리했다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승리이고 내용은 처참한 패배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한 전쟁도 아니고 우리 땅에서 살육당하며 치른 전쟁에다 참혹한 고통과 치욕의 상처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고통이지만, 여자와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이다. 특히 여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한다. 임진왜란 여러 기록 중에 왕을 호종한 근신들은 안전한데서 장계를 보고 대략을 짐작했다면, 형조좌랑으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수은 강항(1567~1618)의 ‘수은간양록’, 이순신이 모함 받아 옥중에서 죽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한 약포 정탁(1526~1605)의 ‘용사일기’, 김성일 휘하로 들어가 의병 모으는 큰 공을 세우고 학봉의 진주서 죽음과 안동의 이장까지 기록한 송암 이노의 ‘용사일기’, 경상도관찰사 김수와 김성일의 막하참모로 여러 가지 전술을 건의하여 의병군이 승리하는데 기여한 효사재 이탁영(1541~1610)의 7년(1592년 3월9~1599년 11월) 기록의 정만록(征蠻錄) 등 여러 자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대스타 이순신과 서애 유성룡의 난중일기와 징비록이 있는데, 난중일기는 7년(1592년 1월1일~1598년 11월17일)간 총 2천539일간에 진중내외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인데, 946일이 빠져있어(정만록은 10일 빠졌다) 한계가 있다. 징비록도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전쟁의 참상을 회고하고 반성하며 뒷날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녹화방송이라면, 앞의 기록들은 전쟁의 현장에서의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라 생방송 같아 더욱 실감난다.

정만록 기록 중에 차마 눈뜨고 못 볼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상주에 살던 사부(師傅)인 하락(河洛)은 영남의 명사인데 왜적과 싸우다 대부인을 모시고 처와 자부와 함께 피난 중에 왜적에 잡히어 부자를 죽이고 자부를 보리밭으로 끌고 가서 10여 명의 적이 욕을 보이고는 놓아주었는데 목을 매어 죽었다.(1592년 7월 2일) “여자 하나를 붙잡으면 부자형제를 가리지 않고 30~40명이 서로 윤간하여 죽게 한다. 서책을 찢어서 더러운 것을 닦는다 하며, 장독에다 오줌 누어 사람에게 먹도록 한다니 그 소행을 어찌 말로 다하랴…. 몸이 늙음을 원망하며 통곡할 뿐이다.(1592년 7월 7일) “호남 미녀가 많이 포로로 잡혀왔는데 애걸하여도 불태워 죽였다. 하니, 참혹하여 들을 수가 없다.(1592년 8월 2일)

수은간양록에는 “적선 수천 척의 배 안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태반이나 되고 바닷가에는 시체가 너저분하게 쌓였다.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았다…. 나를 버리고 달아난 노비는 모두 살았건만 주인을 못내 잊어 차마 가지 못한 자는 적에게 온통 살해되다니…. 나의 둘째형의 아들 가련이는 겨우 여덟 살인데 목이 심히 타서 짠물을 마시고 구토설사를 하다가 병이 생겨 누워있는데 왜놈이 별안간 달려들어 그를 바다에 내던졌다.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1598년 9월 24일)

정유재란때 도요토미는 “사람마다 귀는 둘이 있어도 코는 하나이니 너희들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 바침으로써 수급(머리)을 대신할지어다”이리하여 왜군 한 놈이 코 한 되씩을 소금으로 절여서 수길에게 보냈는데 보내온 코는 수길의 검열을 거친 다음 한데 모아서…. 묻었더니 하나의 구릉을 이루었다. 그렇게 한지 일 년도 안 되어 소금으로 제놈(수길)의 배때기를 절였다.

일본승려 게이넨(慶念)의 기록에는 ”일본 병사들은 포악하고 잔인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베어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서 사슬로 목을 묶어 끌고 갔다.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에서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

이처럼 전쟁은 참혹한 것이다. 그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은 대략 6만~10만명(일본 학자들은 2만~5만), 돌아온 자는 8천482명(한국학자 이상희) 정도다. 부모형제 죽음을 목격하고 불탄 고향산천을 두고 끌려와 농촌이나 무사집의 노비로 비참한 생활을 하며 원한 맺힌 한을 품고 죽어갔다.

 

초헌관으로 참석한 학봉 초상화 그린 화가 김호석(오른쪽에서 두번째).
초헌관으로 참석한 학봉 초상화 그린 화가 김호석(오른쪽에서 두번째).

안동 봉정사 가는 서후면 길옆에 학봉종택이 있다. 학봉종택 높은 솟을대문을 지나자 고택에 서양식 별장같이 잔디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는데 고즈넉하고 편안한 고택의 맛은 흐르지 않고 도식적인 관공서 건물 같다. 아마도 학봉이 중국에 사절로 갔다 와서 중국풍울 가미해서 그럴 것이다. 학봉이 살았던 이 종택은 원래 이 자리였으나 침수가 잦아 오른쪽 가까이 소계서당으로 학봉의 8세손 광찬이 1762년에 옮겼다가 1964년에 다시 옮겨온 것이다. 예전부터 많이 왔던 곳이라 잠시 둘러보고 학봉 유물을 모아놓은 운장각으로 갔다. 학봉의 초상화를 오랫동안 보면서 학봉을 생각했다. 여러 기록과 초상화에 나타난 학봉은 문무를 겸비한 원칙에 충실한 대쪽 같은 선비였다.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 김호석 친구에게 전화하여 학봉의 초상화가 없는데 어떤 기준으로 그렸나 물어보니 문중의 대표적인 20명의 얼굴사진을 조합하여 그렸는데 모두 자기와 닮았다고 하더라며 초상화 봉안할 때 초헌관으로 참석했단다.

학봉이 당파적이든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던 전쟁만큼 큰 일이 없는데 잘못된 허위보고로 7년 동안 온 나라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한 죄 값은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다. 공자도 하늘이 용서 못할 죄는 지어서는 안 된다(獲在於天 無所禱也)했는데….”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