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사 극락보전 앞 풍경. 죽림사는 영천시 금호읍 죽방길 279-57에 위치해 있다.

누적된 피로로 절을 찾아가는 몸과 마음이 밝지만은 않다. 결국은 네비게이션의 지시를 몇 번이나 놓치고 헤매듯 죽림사를 찾아간다. 차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어수선한 도로를 달리다 어느 사이 산속으로 숨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죽림사 일주문 앞에서 나는 엉클어진 내면의 길을 보고 말았다.

양쪽으로 대나무 숲을 거느린 쭉 뻗은 길이 화강암으로 만든 배흘림기둥 안으로 이어진다. 절은 은해사 말사로 신라 헌덕왕 1년(809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사찰이 전소되어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가 또 다시 6.25 전쟁을 겪으며 폐사되고 만다. 그 뒤 1990년 성수 주지 스님이 대웅전을 지으면서 대대적인 불사가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나를 반기는 건 따가운 유월의 햇살뿐이다. 언덕길을 오르는 몸이 유난히 무거운데 드디어 죽림사가 보인다. 뜻밖에 절 앞의 작은 주차장에 제법 많은 차들이 모여 있다. 가파른 돌계단 위에서 보화루가 조금은 위압적으로 내려다본다.

오천관음불전이라는 또 다른 현판을 단 보화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자 극락보전 앞 삼층석탑이 연등에 싸여 화사하다. 눈이 부실 만큼 티끌 한 점 없이 가볍게 허공에서 일렁이는 연등들, 나풀대는 저 수많은 ‘자유의지들’을 향해 나는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다.

마당에서 담소를 나누던 주지 스님이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소탈한 말투로 먼저 인사를 건네며 맞아주신다. 낯설지 않은 편안함이 일순간 지친 시간들을 몰아내고, 태어난 지 한 달이 막 지난 강아지 두 마리의 재롱에 빠져 사찰에 온 걸 잊는다. 강아지와 노는 스님의 장난스런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하다.

불자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격식과 권위의 옷은 일찌감치 벗어버린 듯하다. 순진무구한 강아지와 선지 주지 스님의 사람 좋은 웃음이 지친 발걸음을 쉬어가게 하는 절, 깊은 산중이 아니라서 그런지 절 일을 돕는 보살님과 처사님들도 많아 생동감이 느껴진다.

극락보전 법당으로 향하는 등 뒤로 날씨만큼 쾌청한 보살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참배 후 꼭 공양하고 가세요.” 모처럼 절에서 들어보는 사람 반기는 소리, 인간다운 따뜻함이 살아 있는 사찰이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내 걸음에 비로소 작은 연등이 걸린다. 백팔 배를 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마음은 잠시, 절을 하는 동안 몸은 점차 가벼워져 온다.

지난 한 달간은 힘에 버거울 만큼 손님을 맞느라 기력이 쇠하여 멘탈이 붕괴되고 말았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벗어나고자 전원으로 왔는데 그 새로운 환경이 덜미가 되어 평온했던 삶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모처럼 시간을 거슬러 삭막한 도시 이야기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도 체력적으로 한계가 올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자고나면 피로가 풀린다는 착각은 내 몸을 함부로 평가하는 오만이었다. 육신을 보살피지 않은 탓에 모든 관계들이 부담스럽고 무의미해지기 시작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한없는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다. 전원에도 삶이 따라온다는 것을 간과했었다. 정신과 육체의 예민함을 알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고 말았던 것이다. 휘슬 소리는 늘 아픔과 함께 왔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건 살아 있음을 뜻하며 여유로움을 내포한다고 위안해 보지만 쉽지 않았다. 나의 백팔 배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던 걸가? 스스로 나약한 존재가 아니길 바라며 기운을 담아 백팔 배를 한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통해 좀 더 성장하고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늘 인스턴트식 자기 위안으로 끝낸 건 아니었던가. 절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자기 점검은 간절해진다.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멀리하고 때로는 대결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크고 육중한 몸을 금빛으로 숨기고 빛나는 철조여래좌상, 형상화된 부처님이지만 분명 자기만의 아트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한동안 관계에서 벗어나 내면을 응시하라는 답을 안고 법당을 나선다. 극락보전 앞에서 눈과 귀, 입을 가린 귀여운 동자상 셋이 나를 붙든다. 겸허하게 두 눈 가리고, 두 귀를 막으며, 말을 줄이는 절제성, 그게 사랑이라고 말한다. 되도록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며 고귀한 생각 속에 나를 노출시키고 싶다.

모처럼 공양간에서 맛보는 절밥도 감사하다. 뽀드득 소리 나도록 내 그릇까지 씻어주는 불자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몸에 배인 익숙한 정성의 언어들, 나는 그녀의 오래된 기도를 읽는다. 설익은 배려와 정성은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남을 위하는 일은 나를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지쳐 있던 세포가 깨어나고 다시 아름다운 생각들로 채워진다. 눈부신 생각들이 삶에 잔뿌리를 내리고 무성한 가지를 뻗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돌아오는 길에는 끊임없이 하품만 따라온다. 삶은 수많은 장애물과의 싸움인 걸 어찌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