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날개’를 읽는 한 독법

잡지 ‘조광’에 실린 소설 ‘날개’에 이상이 직접 그린 삽화.

누구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콘텐츠’ 삼아 생계에 필요한 돈을 벌고, 작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에 자신의 예술적 생산물이 화폐로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일말의 거리낌조차 느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 신에서 인간으로 이어지는 시대가 규정하는 정신의 발현으로 중요한 대상이었던 시기는 이미 우리에게 멀리 떠나버렸다. 지금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한껏 경멸의 의미를 담아 불렀던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지금 우리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이 된 셈이다.

예술의 가치는 가늠하기 어려운 복잡한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화폐의 가치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예술가의 생계 때문에, 비싼 예술품에 대한 환호 때문에, 예술작품을 점유한 화폐 가치는 그것 외에 예술 속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가치를 축소시킨다.

작가 이상이 1936년에 쓴 소설 ‘날개’는 사실, 그가 화폐의 가치에 의해 예술이 전도되는 당시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두고 쓴 작품이다. 우리는 작가 이상이라고 하면 골방에 유폐된 천재라는 이미지만을 기억하지만, 이 무렵 그의 글들 속에는 당시의 사회 현상에 대한 예민한 관찰의 결과들이 들어 있었다.

이상은 폐병을 치료하고자 갔던 온천에서 우리가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물에도 값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세상에 빈 땅이 없음을 한탄하며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자신의 책상에 있는 화분만이 유일한 빈 땅임을 깨닫고 한탄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이상이 살았던 시대는 모든 것에 화폐가치가 붙어 본래의 가치를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사회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시대에는 화폐로 교환되지 못할 것은 없다. 시간이나 공간, 취미나 기호, 심지어 인간의 노동력과 성(性)까지도 화폐로 환산되는 것이 바로 그가 목도한 시대상이었다.

이상의 ‘날개’속에는 소설의 주인공과 아내가 살고 있는 33번가가 등장한다. 모두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 33번가에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카페(당시의 카페는 술을 파는 곳이었다)에서 일을 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나’의 아내와 이웃들은 모두 술과 ‘웃음’을 팔면서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존재들이다.

작가 이상.
작가 이상.

이 소설 속 주인공인 ‘나’가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가 화폐가치에 전혀 무지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가치에 무지하다는 것은 사회적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인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작가 이상 자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고안된 인물이다. 이 소설은 결국 화폐가치를 알지 못하던 주인공이 그것을 알게 되면서 결국에는 파멸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화폐가치에 무지한 ‘나’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인물은 그와 유일한 관계인 아내이다. 어느 날 외출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외출해서 쓰라고 준 돈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랬더니 아내는 자신의 방에서 하룻밤을 재워준다. 이때 ‘나’는 시간과 공간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점점 현대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어 어느덧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 있는 티룸에서 커피를 한 잔 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우리가 카페에서 돈을 내고 사는 것은 커피 한 잔이라는 실물인가. 아니면 그 장소의 시간을 사는 것인가. ‘날개’를 통해 이상은 바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비록 ‘날개’의 후반부에서 ‘나’는 완연한 현대의 인간이 되어 나중에는 ‘돈’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것을 파멸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달콤한 즐김이라고 해야 할까.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