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한말의 의병장 유인석은 국권이 강탈당하는 것처럼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을 때 처신하는 방법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내놓았다.

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는 일이요, 둘째는 해외로 망명하여 옛 정신을 지키는 일이요, 셋째는 자결을 하여 뜻을 이루는 것이다.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해 독립에 투신한 유인석은 첫째와 두 번째 방법을 함께 사용한 셈이다. 구한말 3대 시인이면서 우국지사였던 김택영, 이건창은 과거 보러 상경한 구례의 선비 황현을 만나 서울에서 교분을 쌓으며 의기투합했다. 황현은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당시의 과거시험에 환멸을 느끼고 곧 낙향하였지만, 지역을 달리하면서도 세 사람의 교유는 지속되었다.

융희 4년(1910) 7월 일본이 마침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8월에 황현이 그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절명시 4수’를 짓고 자제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사람이 죽는 일이란 쉽지 않은가 보다, 독약을 마실 때 세 번이나 대었다 떼었다 하였으니 내가 이처럼 어리석었단 말인가.’ 하였다. 얼마 있다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이 글은 김택영 선생의 ‘소호당집, 황현 전기(韶濩堂集,黃玹傳)’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강화도에 내려가 살던 이건창이 먼저 세상을 떴다. 그즈음 열강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개화나 척사 등 지식인들의 대응도 본격화됐다.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다했다고 판단한 김택영은 망명을 택하였다. 김택영이 황현의 순국 소식을 들은 것은 중국 상해 인근의 남통에 있을 때였다. 동생 황원으로부터 매천의 자결상황을 자세히 전해들은 김택영은 친구를 기리며 ‘황현의 전기’를 썼다. 매천은 아편을 술에 타서 마셨다. 약효가 발휘되어 숨을 거두기까지는 만 하루가 걸렸다. 김택영은 황현의 전기를 작성하면서 특히 그의 죽음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궁벽한 시골에 사는 선비가 목숨을 끊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택영은 여기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유인석과 동시대를 살았던 매천도 유인석의 세 가지 상황에 직면했다. 김택영은 매천에게 망명을 제안하였으나 가난한 시골 선비가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기에는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매천은 승산이 적고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라는 그의 판단으로 의병항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매천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이었다. 죽어야 할 의리가 없는 매천이 자결한 것은 선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목숨을 끊은 매천은 자기를 성찰하며 역사와 현실을 읽어낸 110년 전의 지식인이었다. 오늘날 여의도에서 도금된 금배지를 달고 도나 개나 민주주의를 외치며 패거리지어 희희낙락하는 위정자들의 머리속에는 무슨 생각이 있을까? 직에 주어진 과한 특권을 자신의 범죄행위 방어에 이용한다거나, 일신의 영욕만 가득 차 국민을 기만한다면, 이 나라는 곧 110년 전과 같은 국가우환을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