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 지방 모 대학에 늦깎이로 교수 임용 막차에 오른 친한 동생 하나가 전화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연인즉슨, 얼마 전, 학과 회의를 했는데, 글쎄, 실컷 잘하고 헤어진 뒤, 서울로 돌아오는 KTX 안에서 업무분장 정리 톡을 받으니, 동생한테 은근슬쩍 까다로운 업무 하나가 끼워져 있더라는 것이다. 동생은 그래, 실수겠거니 하고서 단톡방에 이야기를 하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일은 당신이 맡기로 했다며 벌떼같이 달려들더라는 것이다. 일을 더 하고 덜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심지어 기억 및 상황까지 조작하며 몰아붙이는 게 너무 황당해 조목조목 얘기하니 그제야 다들 ‘그럼, 말고’하는 식으로 수그러들더라는 것이다.

일을 맡기고 싶으면 차라리 면전에다 부탁을 하든지 할 것이지, 배운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잔머리를 굴릴 수 있는가 하고 장탄식하는 동생을 보며, 문득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한평생 고민했던 춘추시대 공자가 떠올랐다.

공자는 세상의 인간을 크게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한다. ‘군자’는 논어에 66번이나 나오는 만큼, 공자의 인간학을 이해하는 핵심 중 하나다. 논어 첫 편인 ‘학이 1장’과 마지막 ‘요왈’ 편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라 할 수 있고(人不知而不<614D> 不亦君子乎), 그렇더라도 천명을 알지 못하면 또한 군자가 될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군자는 논어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보통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화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군자는 그런 데 개의치 않는다. 묵묵히 제 할 일 하면서, ‘천명’을 알고 실천하는 삶을 살 뿐이다, 여기서 ‘천명’은 주어진 사명, 곧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책임감을 갖는 것은 군자의 기본이자 사실 인간의 기본이다. 그래서 독일 철학자 칸트도 ‘인격이란 바로 책임 능력’이라 했고, 청말 사상가 양계초 또한 ‘음빙실(飮氷室)’에서 “책임을 자각하는 것이 인간의 시작이요,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인간의 끝”이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인은 책임감이 없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잔머리를 굴려 책임을 피할까만 생각하고, 통수, 꼼수를 쓰며 이익을 챙길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소인은 도량이 좁고 간사한 것이다. 공자가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으며(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남과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으나, 소인은 남과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는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처럼 소인은 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편 가르기나 하면서도 이 세상을 잘 살아간다고 착각하곤 한다. 남의 고통·아픔을 이용해 수년간 사리사욕 채워 본들 뭐할까? 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인데.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바야흐로 6월이다.

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로 마무리되는 올 상반기, 이럴 때일수록 더욱 책임 전가, 통수, 꼼수로 무장한 소인 대신, 진정한 군자 되기 프로젝트에 한번 동참해 보면 어떨까. 아마도 삶이 이전보다 몇백 배나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