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 무

저녁을 먹다가 국그릇을 엎질렀다

남방에 튀어 오른 얼룩을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박박 문질러 닦다가

문득 지난날들이 떠올려졌다

엎지른 것이 어찌 국물 뿐이었을까

살구꽃 흐드러진 봄날

네게 엎지른 감정

울음이 붉게 타는 늦가을

나를 엎지른 부끄럼

시간을 엎지르며 나는 살아왔네

물에 젖었다 마른 갱지처럼

부어오른 생활의 얼룩들

엎지른 것이 어찌 국물 뿐이었을까

시 전반부의 ‘엎지르다’는 의미는 작위(作爲)가 아니라 무위(無爲)에 의한 것으로 자연스럽고 사소한 일상의 경우이고, 뒷부분의 ‘시간을 엎지르며 나는 살아왔네’라는 시인의 말에는 자칫 작위적이고 의도적인 시인의 의도가 나타난 것 같지만 아니다. 이것마저 무위이고 자연스러움이라는 시인의 의도를 읽는다. 시인의 무위의 삶에 대한 신념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