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경오생 조갑규 씨는 오늘도 일기를 씁니다. 소일거리로 만지던 재봉틀을 놓아버린 뒤 생긴 습관입니다. 91세, 노동에서 해방 되면 자유를 얻을 줄 알았는데 웬 걸요. 뒤늦게야 무료함이야말로 생의 가장 무서운 적임을 알게 됐지 뭡니까. 버젓한 자식들이 둘레둘레 있으니 사전적 의미로는 독거노인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일 일기를 써도 홀로 사는 왕노년의 하루해는 길기만 합니다.

또래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조갑규 씨 역시 평생 ‘심심하다’는 말뜻을 이해할 여가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열여섯에 시집 와, 농사일에서 장삿길까지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닳도록 노동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지금에야 일을 손에서 놓았지만 딱히 일 하지 않는 지금이 더 행복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잡념 생길 겨를이 없었던 바빴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몸은 고되어도 성취감 때문에 날아갈 듯한 날도 많았으니까요.

이상한 바이러스 때문에 요즘은 더 힘듭니다. 성당도, 경로당도 갈 수 없으니 심심함을 넘어 사방이 막힌 기분입니다. 무료함을 지나 적요함의 공기가 방 안을 감쌀 때면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한기가 온몸을 파고듭니다. 혼자 사는 조갑규 씨의 요즘 화두는 ‘무료함과의 전쟁’입니다. 이런 조갑규 씨의 일기장을 훔쳐봤습니다. 두어 컷을 담았습니다. 몇 구절을 원본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코리나 병 때무내 백계 안 나가고 이섯다. 이 병이 언재 끈날지 모른다. 뱅글뱅글 돌면서 하류하류 지냇단다. 아무대 안 나가고 지배 이섯다. 하이 땃히 박게 내보이 버를입피 파락캐 도다낫다. 벅꼿 명알도 불근색가료 벌서 매자간다. 점심 반찬 토란국 계랄찜 해먹다. 오늘 책일다보이 시간가는 모고 이섯다가 벌서 5시가 다대다. 저녁 가래 해먹것다. 오를언 비가 와 날새 컴컴했다. 오늘도 그럭저럭 화루해가 다각구나. 고리나 병대무내 22째 집아내마 갓채이섯다.”

조갑규 씨는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합니다. 기약도 없습니다. 갇힌 날들을 셈하면서 조갑규 씨는 뱅글뱅글 집안을 돕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따뜻해진 밖을 내다보니 버들잎이 파랗게 돋아났습니다. 어느새 벚꽃 몽오리도 붉은 색깔로 맺어갑니다. 무료할수록 허기는 더 잘 찾아옵니다. 점심 반찬으로 토란국과 계란찜을 해먹습니다. 책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벌써 다섯 시가 되었습니다. 저녁으로는 카레를 해먹습니다. 비가 와서 날씨는 컴컴해집니다. 오늘도 그럭저럭 하루해가 다 갔습니다. 22일째 집안에만 갇혀 있습니다. 조갑규 씨 일기체의 담백한 서술 방식이 어쩐지 난중일기를 닮았습니다. 심리가 반영된 내용은 아니지만 진술과 풍경 속에 조갑규 씨의 공허한 내면이 읽히는 듯합니다. 사진에 찍힌 장면 몇 구절도 첨부합니다. ‘왕노년’을 보내는 조갑규 씨의 도돌이표 일상이 이어집니다. 읽기 편하게 맞춤법에 맞게 올려봅니다.

“소설 파랑새를 두 번째 읽었다. 오늘은 37페이지까지 읽었다. 성경 야고보서 4장 11절까지를 읽었다. 점심은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를 구웠다. 새 밥을 해서 맛있게 먹었다. 28일 만에 처음 밖에 나갔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망우공원을 둘러서 큰다리를 건너서 갔다. 옛날에 살던 동네인 방천에서 내려다보았다. 아는 사람 한 분도 못 봤다. 집으로 오다가 어떤 할머니가 나를 보고 손짓했다. 같이 놀다가 갑시다, 했다. 이야기도 하고 오랜만에 잘 놀다가 왔다. 큰딸이 쌀, 돼지고기, 쌀과자 등을 배달시켜줬다. 손자가 사온 파로 김치를 담갔다. 하도 여러 가지를 가져와서 숫자도 모르겠다. 오늘은 봄바람이 완연하다. 밖에 내다보니 개나리꽃, 벚꽃이 피어서 만발하다. 방천에 사람들이 벚꽃 구경한다고 얼마나 많이 다니는지. 막내 내외가 와서 점심 돼지찌개해서 먹었다. 함께 방천 꽃구경하고 공원에 갔다. 집에 와서 커피 한 잔하고 갔다. 한 달 20일 만에 망우공원에 갔더니 빵과 우유를 (봉사회에서) 주었다. 안과 병원에 갔다. 소설책 129페이지 읽었다. 요한묵시록 22장 12절에서 17절까지 읽었다.”-조갑규씨 일기 중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코로나 때문에 집안에서만 뱅뱅 돌다, 모처럼 나들이에 나선 조갑규 씨. ‘아는 사람 한 분도 못 본’ 대목에선 숙연해집니다. 동네 윷놀이 친구들은 모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지요. 성경 읽고 기도하고 소설책 읽고. 그래도 심심하면 식솔들에게 차례로 전화하는 왕노년 조갑규 씨는 제 엄마입니다. 절약 세대의 모범생답게 여백마저 아까워 빽빽하게 공책을 메우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줄 넓고 칸 큰 일기장을 한 더미 사다드렸습니다. 동시대 할머니들이 쓴 시집과 일기집도 곁들였지요. 비껴 간 얘기긴 하지만, 시집과 일기집은 노년이 읽기엔 활자가 너무나도 작았습니다. 누구를 위한 책인지 살짝 아쉬웠습니다. 그나저나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밴 조갑규 씨가 줄 넓은 새 일기장을 잘 활용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