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대개가 ‘승자의 역사’다. 길고 긴 야만 시절 이긴 자들은 어김없이 패자의 진실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왜곡해왔다. 역사 기록에 남은 옳고 그름은 치명적인 조작 여지가 내재돼 있다. 단지 힘으로 이겼다는 이유로 승자가 언제나 ‘참’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이치는 조금만 고민해봐도 다 알 법한 진실 아닌가.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 오자서(伍子胥)는 사사로운 원한을 풀고자 한때 자기가 모시던 초평왕의 주검을 끄집어내어 목을 끊고 구리 채찍으로 300대의 매질을 가했다. 이른바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고사다. 우리 역사에서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다시 목을 자르는 잔혹한 부관참시(剖棺斬屍) 형벌을 일삼은 폭군은 연산군이었다. 생모인 폐비 윤 씨의 사사(賜死) 비극에 원한을 품은 연산군은 김종직·송흠·한명회·정여창·남효온·성현 등 여러 명에게 끔찍한 한풀이를 했다.

지난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 있었는지, 회담록을 수정하거나 폐기했는지의 공방이 벌어졌을 때, 민주당은 ‘부관참시’라며 반발했었다. 일부 극우 인사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훼손을 시도하고, 국립현충원 앞에서 묘소를 파헤치는 퍼포먼스까지 벌여 시끄러웠던 일도 기억난다.

유례를 찾기 힘든 총선 대승으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 1987년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KAL 858기 폭파 사건 진상 조사 결과를 재검증하자는 주장도 다시 불거졌다.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현충원에 있는 친일파 무덤을 파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동안 진보 일각에서는 ‘친일 인명사전’을 기준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60여 명을 계속 문제 삼아 왔다. 여권 내에서는 여수·순천 사건 재조명,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 등도 추진되고 있다. 이 같은 무분별한 과거지향 행태에 대해서 일부 네티즌들은 “살수대첩도 재조사하자고 할 거냐”는 비아냥을 퍼붓기도 한다.

민주당이 왜 또 과거사 뒤집기에 나서고 있는지를 놓고 여러 해석이 나돈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분석은 ‘2022년 대선 준비’다. 민주당의 정치전략은 철저하게 과거사를 이슈화해 한(恨)을 끄집어내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수구꼴통 불의세력 프레임에 가두는 선동기법에서 출발한다. 지난 선거에서 연전연승한 결정적인 비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이런 ‘갈등 재생산’ 방식의 정치는 삼가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악마적 바이러스 발톱에 무참히 할퀴어 생존 여부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국민 앞에 매머드 여당이 혐오를 퍼뜨리는 정치공작만을 궁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모처럼 건강한 정책 야당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제1야당과 함께 미래를 겨루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냄새나는 쓰레기통 엎어놓고 선동질에 몰두하는 정치로는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