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2004년에 출간된 강석경 작가의 ‘경주 산책’을 어렵게 구했다. 지금은 품절이라 온라인 중고서점을 뒤졌다. 그중 한 곳에서 이상하게도 정상가보다 비싸게 팔고 있었다. 유심히 보니 ‘저자의 사인’이 있는 책이라서 그랬다. 얼른 신청했더니, 중고서점 사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받는 사람 이름도 있는데 구입하시겠습니까?” 잠깐 망설였지만, 흔쾌히 구입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하루 만에 책이 왔는데 첫 장에 초록색 색연필로 받는 사람과 작가의 사인이 쓰여 있었다. 아무렴. 작가의 손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다. 강석경이 누군가. 1985년 제10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숲속의 방’ 작가가 아닌가. 한창 예민했던 문학청년 시절에 강석경의 소설 ‘숲속의 방’은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케 해주었다.

내 인생 소설의 작가가 가까운 경주에 산다는 것만으로 ‘경주’는 더 특별해졌다.

‘내가 경주로 돌아온 것은 나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온 회귀이다.’ 사실 강석경 작가의 고향은 대구다. 그런 그녀가 경주에 자리 잡은 건 무슨 이유일까? 책에서 그녀는 말한다. “존재의 불확실성에 방황하면서 성년의 세월을 보내고, 세계도 돌아보고 뒤늦게 경주에 터를 잡은 것은 그야말로 뿌리로의 귀환이 아닐까. 내 근원의 고향인 자연으로, 25년간 살았지만 뿌리내리지 못한 서울이 연옥처럼 떠오르는 것은, 자연과 분리된 삶 때문이리라. 도시의 삶은 늘 나를 허기지게 했다. 온갖 현세적인 욕망을 추구하느라 입에 거품을 무는 도시의 생리. 나도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변해버린 대구도 고향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내게 고향이란 육신이 태어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이다.”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곳이 고향이다. 경주가 그녀에게 그런 곳이다. ‘황룡사지에서’라는 글에서 수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경주’인지를 밝힌다. “근원적인 것을 보여주기에 능이 있는 고도의 풍경은 아름답다. 산 자와 죽은 자,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경주는 늘 나를 매료시키고, 내게 영감을 준다. 환상과 영감의 샘물인 경주와의 조우는 작가로서 행운이지만 정신의 고향을 갖게 되었으므로 한 자연인으로서도 행복한 일이다. 누구와의 만남이 내 인생에서 필연이었는지는 말하기 힘들지만, 경주와의 만남은 그래서 필연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내게 경주는 청마 백일장과 목월 백일장이 열렸던 곳이다. 까까머리 학창 시절에 포항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역에 내려 의기양양하게 백일장에 참가하곤 했다. 요즘엔 불국사가 좋아졌다. 특히, 비에 젖은 석가탑과 크고 작은 돌탑들을 좋아한다. 황남동에 ‘소소밀밀’ 그림책방과 서악동에서 ‘시인의 뜨락’을 운영하는 부부 시인을 좋아한다. 동리목월문학관 특강에서 만난 경주의 엄마, 아빠들과 아이들을 좋아한다. 월포, 칠포, 구룡포, 양포도 좋지만 경주 감포를 더 좋아한다. 경주 남산 능비봉 오층석탑을 좋아한다. 적다 보니, 내게도 경주는 필연적인 장소다.

내년에 직장을 옮기는데,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는 경주로 갈 운명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