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언젠가는 순례자가 되고 싶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의 목적지인 콤포스텔라 대성당 광장에는 흐느껴 우는 순례객들이 많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목적지인 콤포스텔라 대성당 광장에는 흐느껴 우는 순례객들이 많다.

◇ 산티아고 순례자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알베르게(숙소)에 순례자가 아닌 일반 여행자는 나밖에 없는 듯. 다들 배낭을 침대 맡에 둔 순례자들이다.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광장에 갔더니 순례를 끝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쉬고 있었다. 야고보의 유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했고 그의 유해는 신화 속 이야기처럼 발견되어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곳으로 유해가 옮겨진 시기인 9세기 경 스페인(에스파냐)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고 땅을 되찾고자 했던 에스파냐 지배자들은 유럽 다른 나라의 지원이 필요했다. 순교한 지 1천년이 지난 행방을 알 수 없는 성인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옮기고 대성당을 지은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 군사적 이유가 컸다고 할 밖에. 중세시대 신심 가득한 순례자들은 갈 수 없는 예루살렘 대신 이곳을 찾았을 테고 이들은 자연스레 에스파냐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지원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야 돈이든 군대든 만들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벌일 수가 있으니. 어쨌거나 대성당 건축을 시작한 당시 에스파냐의 왕 알폰소 2세는 탁월한 수완가였을 듯하다.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팜플로나의 카페 이루냐.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팜플로나의 카페 이루냐.

가장 많은 순례자가 찾는 프랑스 생 장 삐헤 드 뽀흐에서 이곳 산티아고까지 루트는 약 800킬로미터, 40일 남짓 걸어야 하는 길이다. 신심이 없는 도보여행자일지라도 순례의 마지막 대성당 앞에 서면 아마 이전과는 다른 나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광장엔 흐느껴 우는 순례자들이 많았다. 여행이라기보다 고행에 가까운 길을 걸었던 이유가 다들 있을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순례길의 마지막에 느끼는 저 폭풍과 같은 감정의 북받침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 것이겠지. 주변에도 이곳을 다녀온 분들이 꽤 있고 이야기도 많이 들어 걷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녀온 기분이다. 언젠가 여유가 되면 순례자가 되어 보고픈 생각도 있지만 가능할지는. 산티아고에서 하룻밤만 자고 700킬로미터를 달려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달리며 많은 순례자들을 봤다. 모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

예부터 있던 순례길이 다시금 인기를 끌게 된 이유가 뭘까. 훌륭한 자연환경, 저렴한 숙박시설, 지역 주민의 친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길에 담긴 역사성, 이야기가 아닐까.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했고, 또 새로운 순례자들이 쌓아가는 이야기가 계속 사람들을 카미노로 불러 모으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길만 내는 것으론 부족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길이어야 사람들이 찾겠지.

 

팜플로나 거리 곳곳에서 소몰이 축제 참가자들의 의상을 팔고 있다.
팜플로나 거리 곳곳에서 소몰이 축제 참가자들의 의상을 팔고 있다.

◇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

팜플로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찾았다. 첫 번째는 헤밍웨이가 이곳에 머물렀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후반부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에슐리가 젊은 투우사 로메오와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 바로 팜플로나다. 두 번째는 주변 다른 도시보다 숙소가 저렴한 때문이었다. 카미노 여정에 있는 도시라 값싼 알베르게가 많다. 프랑스로 넘어가기 전 머물고 가기 좋은 듯하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은 ‘노인과 바다’라지만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가장 사랑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도 스페인이 배경이었고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경험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스페인을 아낀 작가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책보다 영화로 아주 어린 시절 먼저 만났다. 마리아 역을 맡았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키스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키스 장면의 그 명대사는 원작자가 아닌 극작가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키스할 때 코는 어디로 가죠? 그게 늘 궁금했어요.”

내일 쉬엄쉬엄 헤밍웨이가 단골로 찾았다는 카페도 가보고 이곳저곳 돌아볼 생각이다. 이 먼 이국에서 함양 청년 셋과 한 방에 묵게 됐다. 세상은 넓고도 좁구나.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 걸까?

 

산페르민 축제를 앞두고 흥겹게 합주를 즐기는 연주자들.
산페르민 축제를 앞두고 흥겹게 합주를 즐기는 연주자들.

팜플로나는 산 페르민 축제를 앞두고 구시가지는 벌써 분위기가 무르익는 중이다. 소몰이로 유명한(사람이 소를 모는 건지 소가 사람을 모는 건지 애매한) 산 페르민 축제는 매년 7월 6일부터 시작한다. 만약 축제 기간이었다면 팜플로나에는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다. 질주하는 소와 도망가는 사람이 뒤엉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위험한 놀이를 수 세기 동안(1591년부터 시작) 전통으로 이어온 이유가 뭘까. 단순한 오락으로 보기엔 무모하고 위험하고 잔인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거겠지만.

헤밍웨이도 이 소몰이에 참여했고 그래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겠지.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이루나 카페도 슬쩍 구경하고 소몰이 골목을 따라 걷다 팜플로나 시민회관에 들러 산페르민 축제를 찍은 사진전도 보고 19세기 파가니니와 함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사라사테를 기념하는 전시실도 보고 왔다. 찌고르바이젠을 작곡했고 다른 연주자가 범접할 수 없었던 기교로 청중을 사로잡았던 그의 고향이 팜플로나인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거리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갤러리는 조용해서 소파에 앉아 교양 있게(?) 음악을 감상했다. 시민회관 중앙홀엔 축제기간 동안 음악 공연이 있는 듯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만든 무대는 훌륭했다. 낮은 단상과 플라스틱 의자가 놓였을 뿐이지만 건물 자체의 공간감이 워낙 훌륭해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생동감을 불어넣을 것 같다.

 

19세기 유럽 청중을 휘어잡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는 팜플로나 출신이다.
19세기 유럽 청중을 휘어잡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는 팜플로나 출신이다.

◇ 스페인을 지나 다시 프랑스로

만화 페스티벌로 유명한 앙굴렘에서 하루 묵으려 했으나 최대한 파리 가까이 가서 쉬는 편이 나을 듯하여 그냥 지나기로. 인구 6만 명의 작은 도시가 만화 페스티벌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뭘까, 한번 그 도시에 가보고 싶었었다. 아쉽지만 포기. 러시아에 들어갈 때까진 최대한 경비를 아껴야 한다. 안개 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보르도의 포도밭을 지나 푸아티에의 밀밭을 가르고 부르주 외곽에 있는 주로 트럭 운전자들이 묵는 숙소에 들어왔다. 파리까진 약 250킬로미터 남았고 팜플로나에서 여기까지 800킬로미터쯤 달렸다. 거의 10시간 넘게 로시를 타고 왔는데 이쯤 달리면 내가 로시인지 로시가 나인지, 오토바이와 몸과 영혼까지 합친 듯한 기분이 든다. 묶어둔 2리터 생수병 안에 햇빛을 받아 따끈하게 데워진 물을 등에다 붓고 장갑을 적셔 더위를 쫓아보지만 마르는 건 순식간이다. 로시와 함께 열덩어리가 되어 유럽을 남에서 북으로 점프하듯 달리는 중이다.

오늘처럼 달리는 날엔 숙소에 들어와서 땀에 절은 티셔츠와 속옷, 양말을 빨고 샤워하고 누우면 열을 세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 눈을 부비며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여행 중 유일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내일 계획(주로 지도 검색)을 세우는 시간이니 미룰 수가 없다.

하루만 지나도 오늘 있었던 일이 가물거리니. 파리에선 4일 동안 머물 예정이다. 최대한 주말을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쾨벤하운, 오슬로, 스톡홀름, 헬싱키를 거쳐 최대한 빨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갈 작정이다.    /조경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