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경당종택과 장계향

경당과 장계향이 태어난 경당종택.
경당과 장계향이 태어난 경당종택.

댐으로 마을이 수몰되고 대규모 공단으로 마을이 사라질 때 옮기는 고택이 많지만 예전부터 우리의 한옥집들은 필요에 따라 많이 옮겨지었다. 안동의 경당 종택도 인근 마을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집은 누가 살았고 어떤 사람이 태어난 것도 중요하다. 경당종택은 퇴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경당 장흥효가 나고 살았고, 경당의 무남독녀 딸로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주인공 장계향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 시대를 뛰어넘는 아버지와 딸의 파격적인 아름다움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대부분은 딸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러나 시대의 상황이 남존여비. 남녀유별이 정치,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굳혀진 조선시대에 딸에게 한문을 가르친다는 것은 깨어있는 선각자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경당 장흥효는(1564~1633)는 12살 때 이웃의 학봉 김성일에게 학문을 배운다. 어릴 때부터 행동이 단정하고 침착하여 꼭 필요한 말만 했다는 심지 곧은 내향형의 선비기질을 타고났다. 그는 배움에 그치지 않고 이치를 탐구하며 깊게 사유하고 실천하는 선비였다. 학봉 뿐 아니라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에게 사숙했으니 세분 모두 퇴계의 수제자들이다.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세분의 장점을 흡수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마침내 퇴계에서 학봉으로 이어진 맥을 받아 제자이며 사위가 되는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에게 고스란히 전해준 훌륭한 학자이자 교육자이다. 부인은 봉화 닭실의 권씨 부인으로 18년 만에 낳은 딸이 장계향(1598~1680)이다. 그가 태어날 때는 온 조선이 쑥밭이 되어버린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되는 5일 뒤에 태어난다. 권씨 부인은 병약하여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해 장계향은 무남독녀가 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가 글을 가르치면 뜻을 이해하고 문학적인 감수성이 뛰어나 이웃마을의 백발의 노인이 군대 떠나는 아들 때문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백발의 늙은이가 병이 들어/ 서산의 해처럼 위급하네/ 두 손 모아 기도하지만/ 하늘은 어찌하여 응답이 없나./ 이처럼 가슴 찡한 ‘학발시(鶴髮詩)’를 짓는다. 비 내리는 한옥은 선경의 경지를 품어낸다. 계향은 내리는 비를 보고 /창밖에 소소소 내리는 비/ 소소소 소리가 자연스럽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자연스럽네./ 감수성을 듬뿍 담아 ‘소소음(簫簫音)’을 노래한다.

 

광풍정과 제월대.
광풍정과 제월대.

황진이가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알고는 시와 공부를 접고 기생의 길로 갔지만, 계향은 안동 장씨 학자의 노른자 집안이었지만, 여자의 한계는 있었다. 15살의 계향도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 하고, 시를 짓고 글을 쓰는 것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닌 시대의 한계를 알고 글과 시를 접고 밥하고 음식 하는 현모양처의 길을 들어선다. 어머니 친정 안동 권씨의 봉화음식과 안동의 음식이 융합된 음씩 솜씨가 무르익은 19살에 아버지의 제자 석계 이시명(1590~1674)에게 시집간다. 석계는 임진란 때 안동, 예안 의병장으로 순국한 광산김씨 김해의 딸이 1남 1녀를 낳고 죽은 상태라 계향은 재처로 들어간다.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도 무남독녀 외동딸을 아이가 둘에다 8살 많은 기혼자의 재처로 보내는 아버지도 대단하다. 물론 이런 제약을 뛰어넘는 석계의 학문과 인간 됨됨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선택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학문은 사위 석계와 외손 갈암 이현일(1627~1704)에게 이어졌고, 계향과 석계는 죽을 때까지 서로 귀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하며 살았다. 부부가 서로 공경함은 시대와 상관없이 지켜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1622년, 어머니 권씨가 죽자 홀로 남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하여 친정에 머물며 아버지를 보살피고 대를 잇기 위해 재혼을 권유한다. 딸 계향의 권유에 60살의 아버지 경당은 안동 권씨와 재혼하여 3남 1녀를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간다. 새엄마는 계향보다 10살이나 어린 15살이라 친정의 허락을 받아 3년간 친정집에 머물며 어린 새어머니에게 친정의 살림살이를 가르친다. 이때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외할아버지께 배우도록 하여 퇴계 학맥을 잇는 대학자로 키워낸다.

1933년 아버지가 죽자 3년 상을 끝내고 8살의 이복동생을 데리고 와서 학문을 가르친다. 조금 뒤에는 새어머니와 3남매를 영해로 모시고 와서 아버지 제사와 혼인까지 챙겨준다.대학자 아버지 경당과 현모양처의 딸 계향은 윤리를 뛰어넘는 아름답고도 인간적이고 파격적인 사랑이다.
 

정부인 장계향.
정부인 장계향.

#. 경당과 장계향의 흔적을 찾아서

안동 서후면 봉정사 가는 길에 경당종택을 찾았다. 추운 북부지방 안동의 집들같이 사방으로 감싼 ‘ㅁ’자형의 고택이고 경당종택의 편액이 유난히 큰 글씨였다. 이 사랑채에서 결혼하고도 18년 동안 자식 없이 학문에 매진한 경당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외동딸 계향이 총명했지만 아들 없는 아쉬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였을 경당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럴수록 학문에 더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아들로 대를 잇고 출세하는 속세적인 시대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붕괴 직전의 불행은 백성의 삶에 파탄으로 이어지고 학문과 현실사이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책상위에 ‘대통령’을 붙이고 공부했다더만 경당은 공경할 ‘경(敬)’을 책상 위에 써 붙이고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

장계향도 병약한 어머니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200리 떨어진 영해로 시집갔어도 그리고 홀로된 아버지를 위하여 돌봐주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한다.

지금의 고택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경당과 장계향이 태어난, 옮기기 전의 춘파마을의 광풍정 정자로 갔다. 옛 정자는 아름답다. 좋은 경치가 필수적이니 자연 속에서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이 정자다. 원래 경당 고택이 이 정자 옆에 있었고 이 정자는 경당이 거의 말년(1630년대)에 초당을 지어 문인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지금의 기와정자는 지역의 유림들이 1838년에 개축한 것이다. 광풍정(光風亭) 뒤에는 큰 바위 덩어리가 흔들림 없는 경당의 마음같이 버티고 있다. 그 바위에 능주 목사를 지낸 김진하(1793~1850)가 세로로 남긴 ‘경당장선생제월대’ 새겨놓은 글씨가 있다. 그 바위 위에 제월대(霽月臺) 건물은 멀리서 보면 괜찮아도 옆에서 보면 건물의 짜임새도 없고 격도 떨어지는 건물이라 바위를 모독했다. 상량을 보니 단기 4319년(1986) 건립한 졸작이었다. 왜 우리시대 짓는 건물들은 예전 고택보다 못할까.

장계향이 마지막 생을 다한 영양 석보 두들마을을 가는 길에 근처의 의성 김씨 학봉종택을 보고 조금아래 원주 변씨 간재종택으로 갔다.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 학봉종택을 보다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흐르는 간재종택을 보니 답답했던 마음에 왠지 모를 기쁨이 흘렀다. 오늘 보는 고택들은 예전에 봉정사 가는 길에 많이도 들렸던 고택들이다. 마침 잔잔한 맑은 미소 머금은 소녀 같은 주영숙 종부와 착하고 선량하게 보이는 변성렬 종손과 잠시 차 한 잔에 의미 있는 대화가 행복했다.
 

아름다운 낭만이 흐르는 간재종택.
아름다운 낭만이 흐르는 간재종택.

#. 안동의 신사임당, 영광과 상처, 그리고 죽음

누구나 한 평생 살면서 슬픔과 기쁨도 있고 말 못할 사연과 고통도 있다. 또 영광이 있으면 상처도 있다. 장계향을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1504~1551)과 비교해서 안동의 신사임당이라고 한다. 장계향이 무남독녀였다면 신사임당은 아들 없는 여형제만 있었고, 두 분 다 시, 서, 화에 시경에 사서삼경까지 익힌 유학이 스며있는 교양인이었다. 묘하게도 19살에 결혼하는 것과 친정부모 각별히 챙기는 것은 같다. 신사임당이 7자녀 중에 걸출한 율곡 이이(1536~1583)를 낳았다면, 장계향은 7남 3녀(1남1녀는 전처 소생) 중 갈암 이현일을 낳았다. 수명은 신사임당과 율곡 모두 48살에 단명하였다. 이에 비해 장계향은 83살, 갈암도 78살까지 장수하며 살았다. 신사임당이 결혼할 때 축첩이 관례였고 제도화되었지만 첩을 안 두기로 약조했는데 남편 이원수는 딴 살림 차린다. 신사임당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인데다 남편과 격이 맞지 않아 괴로운 나날이 쌓여 병이 들어 스트레스로 죽었을 것이다. 허난설헌이 남편 김성립보다 격이 높아 비극의 생을 마쳤듯이…. 이에 비해 장계향은 서로 아버지에게 학문을 익혀 남편 석계와 격이 맞았을 것이다.

 

장계향이 생을 마감한 검소한 석계고택.
장계향이 생을 마감한 검소한 석계고택.

1640년 인량에 살던 석계와 장계향은 30여 명의 식솔을 데리고 영양 석보 두들마을에 정착한다. 13년 사는 동안 큰 흉년들고 전염병에 시어머니 죽고, 큰딸은 친정 와서 아이 낳다 죽고. 둘째딸은 친정에 어머님 뵈러 왔다가 죽는 불상사에 더 깊은 영양 수비면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이들 장래를 위하여 안동으로 옮기고 마지막은 두들마을로 돌아와 친정과 시댁의 온갖 길흉사를 치루고 ‘음식디미방’책 쓰고 죽는다. 두들마을은 온통 장계향의 음식테마 건물이 들어차 있다. 석계고택은 검소하게 살다 숨을 거둔 장계향 다운 소박하고 퇴락한 건물이었지만, 지금의 장계향 테마 건물들은 궁전 같아 장계향이 웃을까, 슬퍼할까.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