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이규보(1168~1241)에 대해서는 극명하게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가 있다. 13세기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극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인 정권 아래의 기능적 지식인으로 권력에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이규보가 태어나고 2년 후인 1170년 무신난이 일어난 난세였다. 천부적인 문재(文才)를 지니고 어려서부터 중국 고전을 익힌 지식인이 살아가기에는 녹록치 않은 시대였을 것이다. 이규보는 아홉 살에 이미 신동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시재(詩才)를 보여 주었고, 성격 또한 자유분방했다. 시대와 어울리기 어려운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 이규보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과거에 세 번을 낙방하고 네 번째로 응시한 사마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오랫동안 관직은 주어지지 않았다. 방황하며 술을 마셨고 장자사상에 심취하여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동경하기도 했다. 무신정권과 화합하지 못하고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시와 술을 즐기며 고담(高談)을 일삼던 죽림칠현 같은 이들의 눈에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한동안 그들의 시회(詩會)에 출입하며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기도 했으나 이규보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택한다. 서른 즈음 정권의 요직에 있는 이에게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호소하고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쓴다. 그러다 최충헌의 시회에 초청받아 그를 칭송하는 시를 쓴 덕분에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본인으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실망스러운 처신이었을 수도 있겠으며, 변절자란 지목도 있었을 법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규보는 내면세계의 갈등을 돌을 내세워 스스로 문답을 적었다.

‘동국이상국문집 후집, 돌의 물음에 답하다(答石問)’의 내용을 살펴보면, 큰 돌이 이규보에게 ‘(중략) 사람은 만물의 영장인데 어째서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외물에 부림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떠밀리는가. 외물이 유혹하면 거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외물이 다가오지 않으면 우울하여 즐겁지 못하며, 남이 인정해 주면 기를 펴고, 남이 배척하면 기가 꺾이니, 그대처럼 본래의 참모습을 잃고 지조 없는 존재도 없네. 만물의 영장이 이런 것인가!’

이규보가 답하길, ‘너란 물건은 불서(佛書)에 우둔하고 미련한 것들의 정신이 목석으로 환생한다, 라고 했으니 너는 이미 정기와 광명을 잃고 돌덩이로 타락한 것이다. (중략) 내가 죽어 땅에 묻히면 너는 나의 비석이 되기 위해 깎여서 상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물에 의해 움직여지고 본성을 손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도리어 나를 비웃는가?’ 여기서 돌은 자신의 선택을 비난하는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고 자기 내면의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다.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영욕이 갈리고 궁달(窮達)이 판가름 나는 선택이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있다. 어쩌면 삶의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선택 앞에서 고뇌하고 해명이라도 하는 이규보의 인격이 오늘날의 위정자들에게 비춰보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