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희<br>인문글쓰기 강사·작가<br>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며칠 전 전화기가 울린다. “선생님, 열무김치 담갔는데 갖다드릴게요.” “어머나, 아니에요. 제가 가야죠.” 내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시는 이 분은 사실은 열 살 정도 언니뻘 되는 분이다. 집으로 가니, 곧 태어날 손주를 위해 뜨개 인형을 100개 정도 만들었다며 보여주신다.

“선생님은 아직 시간이 무서운 거 모르죠? 내 나이 되면 시간이 제일 무서워. 시간 보내느라고 뜨는 거야.” 하시지만, 사실은 봉사 활동도 하고, 공부도 꾸준히 하는 분이다. 오래 기다린 손자라서 기쁜 마음에 열심히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무섭다’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녀들이 장성해서 분가를 하면 집이 휑해진다. 그만큼 할 일도 줄어든다. 그렇다고 돈을 벌거나 봉사활동 하기도 쉽지 않다. 친구와 수다 떠는 것으로 일상을 채우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지난 삶을 돌아보고 남은 삶을 잘 살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절실하게 올라오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50세 이상의 중장년들을 위한 사회교육기관이 생겨서 이런 욕구를 많이 채워준다. 이런 곳에서 인생이모작, 삼모작을 준비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나이듦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공부와 일상 나누기를 같이 하는 것이 좋다. 정서적 연대감 형성에는 소소한 일상 나누기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방문한 공방도 그런 곳이었다. 주인장은 출자자를 모아 사무실을 얻어 그들이 하고 싶은 강좌와 모임을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오늘 갈비를 많이 쟀어요. 나눠 가실 분!” 하고 밴드에 올리면 “저요”, “저요” 금세 마감된다. 그렇게 공부와 일상 나누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모임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의욕은 없어 보인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무모한 것만은 아니지만, 인생 후반기에는 아무래도 버거워진다. 체력도 받쳐주지 못하지만, 나이듦을 수용하는 일이 시급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자식만 바라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배우자와 지혜롭게 같이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의연하게 준비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적 통찰과 정서적 지지가 필요하다. 그런 과제는 이웃과 함께 할 때 힘을 얻는다.

이웃에게 손을 내밀지만 일방적 헌신은 아니다. 지나친 열정과 헌신 뒤에는 인정욕구와 보상심리가 숨어 있다는 것도 알아챈다. 나이가 들면 현실감각이 생겨서 시행착오가 줄어든다. 수익과 헌신 그 중간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게 된다.

내게도 시간이 무서워지는 시기가 곧 다가올 것이다. 그동안 해온 인문학 공부와 생협 소모임 활동을 밑거름 삼아 지속가능한 ‘공부와 일상’의 이웃공동체를 꿈꾼다. 지적 허영도 쏙 빼고, 거창한 대의도 쏙 빼고, 밀실도 잃지 않으면서 광장도 만들어가고 싶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