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성자 권정생 (중)

20세기 한국 소설이 가장 많이 그리고 진지하게 다룬 제재는 6.25이다. 6.25가 우리 민족에게 가져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권정생은 아동문학의 영역에 6.25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적극적으로 가져온 대표적인 작가이다. ‘몽실언니’(1984)는 ‘초가집이 있던 마을’(1985), ‘점득이네’(1990)와 함께 권정생이 발표한 ‘6.25 전쟁 삼부작’ 중의 한 편이다. ‘몽실언니’는 장편소년소설로서 1981년 처음 연재를 시작해, 198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오랜 동안 사랑받아 온 스테디셀러이며, 1990년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권정생의 대표작이다.

 

몽실의 박애(博愛)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검둥이 아기”를 돌보려고
애쓰는 장면이다.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검둥이 갓난아기”를 보고, 지나던
사람들은 “화냥년의 새끼!”라며 침을 뱉고 발길로 걷어차
죽이려 한다.
이 때 몽실은 자신의 온몸을
던져 아기를 보호한다.

‘몽실언니’는 6.25를 전후한 시기에 몽실이라는 소녀가 일곱 살부터 열한 살에 이를 때까지 두 명의 아버지(정씨, 김씨)와 두 명의 어머니(밀양댁, 북촌댁)를 모시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세 명의 동생(김영득, 김영순, 정난남)을 돌보며 온갖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이다. 해방 뒤 귀국하여 살강마을에서 어렵게 살던 몽실의 어머니 밀양댁은, 남편 정씨가 일자리를 찾아 집을 떠난 사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몽실을 데리고 댓골마을의 김씨에게 시집을 간다. 이후 밀양댁이 아들을 낳자 김씨는 몽실을 구박하고, 몽실은 김씨의 폭력으로 평생 다리 하나를 평생 못 쓰게 된다. 노루실의 정씨에게 돌아온 몽실은 정씨가 새로 얻은 북촌댁과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전쟁이 터져 정씨는 전쟁터로 끌려 나가고, 북촌댁은 아기를 낳은 후 삼일만에 병으로 죽는다. 약해진 몸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정씨는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는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몽실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꿋꿋하게 인생을 헤쳐 나간다.

‘몽실언니’의 주요 배경은 안동 일직면 운산리를 중심으로 한 경북 의성과 청송 등이다. 안동의 대표적 시인인 안상학에 따르면, 일본에서 귀국한 몽실의 가족이 처음 살던 살강마을은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으며, 몽실의 엄마인 밀양댁이 김씨에게 새로 시집 가서 살던 댓골마을은 경북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에 있다고 한다. 댓골마을은 몽실이처럼 귀국동포였던 권정생 가족이 일본에서 돌아와 1년 반 동안 살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엄마 북촌댁과 함께 살던 노루실은 안동시 일직면 운산장터에서 남쪽으로 5리 밖에 있으며, 몽실이 구걸을 하여 동생 난남이를 먹여 살리던 장터는 운산장터를 말한다고 한다. (안상학, ‘권정생이 그린 몽실의 길과 마을’, 창비어린이, 2011.3, 183-192면) 권정생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통하여 생동감이 넘치는 몽실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민족 중의 그 누구도 6.25의 상처로부터 예외일 수 없겠지만, 권정생 역시도 그 고통의 한복판에 있었다. 전쟁이 나자 권정생의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모르게 되었다. 또한 권정생이 평생 동안 살면서 작품을 집필한 안동 조탑마을은 6.25 전쟁 때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 격전지 중 하나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마을 사람들의 억울한 희생이 많았다고 한다.(원종찬, ‘속죄양 권정생’, 권정생의 삶과 문학, 창비, 2008, 107면) 권정생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전쟁의 다양한 모습은 ‘몽실언니’라는 장편의 실감나는 서사적 육체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몽실의 가장 큰 특징은 약자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우선 몽실언니라는 제목처럼, 몽실은 동생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준다. 김씨네서 구박을 받다가 고모를 따라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도, 김씨와 밀양댁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 영득이를 두고 어떻게 가나?”라고 걱정을 한다. 나중에 밀양댁이 영득이와 영순이를 남기고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노루골에서 댓골마을을 오가며 영득이와 영순이를 돌보기도 한다. 특히 정씨와 북촌댁 사이에서 태어난 난남을 향해 쏟는 사랑과 정성은 초인적이다. 북촌댁은 난남을 낳고 사흘만에 죽는데, 이후 몽실이는 식모살이를 하거나 구걸을 하면서까지 난남을 키워낸다. 그러한 몽실의 사랑은 같은 핏줄을 지닌 가족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이나 인종의 경계도 뛰어넘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것이다. 몽실은 “인민을 못살게 하는 반동 분자는 죽여야 해!”라고 말하는 의용군에게 반발하며, 의용군의 총구 앞에서도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다. 몽실의 박애(博愛)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검둥이 아기”를 돌보려고 애쓰는 장면이다.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검둥이 갓난아기”를 보고, 지나던 사람들은 “화냥년의 새끼!”라며 침을 뱉고 발길로 걷어차 죽이려 한다. 이 때 몽실은 자신의 온몸을 던져 아기를 보호한다.

“검둥이 아기”를 위해 몸을 던지는 몽실의 모습은 2007년에 작성한 유언장의 마지막과 닮아 있다. 유언장은 “제 예금 통장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베트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이충렬,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산처럼, 2018, 401면)로 끝난다. 여기에는 권정생이 평생 간직한 아이들과 평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통일에 지향이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마음은 결코 한민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티베트 아이들에게까지 열려 있는 것이다.

몽실이는 결코 동생과 부모의 사랑을 다투고, 성장에 따르는 심신의 스트레스로 힘겨워하는 철부지 언니가 아니다. 권정생이 그려낸 몽실언니는 차라리 위대한 모성을 지닌 어머니에 가까운 모습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권정생 문학의 변치 않는 중요한 요소이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무명저고리와 동화’도 희생적인 어머니를 그린 작품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권정생에게 어머니는 참으로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권정생의 자전적 산문인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1986)에는, 작가의 어머니가 베풀었던 사랑이 눈물겹게 묘사되어 있다. 1957년 권정생의 어머니는 객지생활을 하다가 폐결핵에 걸린 아들을 집으로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결핵균이 신장과 방광으로 번지는 상항에서 권정생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으며, 이 때마다 어머니는 함께 잠을 자지 않으며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산과 들로 다니며 약초와 메뚜기, 뱀, 개구리를 잡아와 먹였고, 벌레 한 마리도 죽이는 것을 꺼리시던 어머니가 이 때 껍질을 벗겼던 개구리만 해도 수천 마리가 넘을 거라고 회상한다. 이런 어머니의 정성으로 죽기만을 기다리던 권정생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권정생은 사실상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몽실을 왜 굳이 ‘어린 언니’로 만들었을까? 이것은 독자인 소년 소녀들을 위한 배려일 수 있다. 동시에 몽실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과 순수한 인간애를 발휘하기에 어머니는 적당하지 않은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대는 폭력적인 가부장제가 철통같은 지배력을 발휘하는 시기였다. 실제로 ‘몽실언니’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지극히 폭력적이며 이기적이다. 몽실이에게 폭력을 휘둘러 평생 다리 하나를 못 쓰게 한 김씨는 말할 것도 없고, 친아버지인 정씨 역시 몽실을 “술 취하고 때리는 것”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렇기에 몽실이 “어느 쪽이 김씨 아버지인지 어느 쪽이 정씨 아버지인지 잘 가려내지 못할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아버지들의 모습은 “사람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6.25 전쟁과 닮아 있기도 하다.

여자는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 수 없단다”나 “여자라는 건 남편과 먹을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단다.”와 같은 말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어머니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은 남편의 핏줄과 관련된 존재로만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몽실의 친엄마인 밀양댁에게서 가부장제가 강제한 가족주의의 한계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밀양댁은 처음 몽실이를 데리고 김씨네 집에 가지만, 김씨의 아들 영득이가 태어나자 끝내 몽실이를 정씨에게 보내는데 동의하고 만다. 나중에 북촌댁의 죽음으로 돌봐주는 이가 없게 된 몽실이가 갓난아기인 난남이를 데리고 왔을 때는, 자기와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순이에게는 젖을 먹이면서도 암죽만 먹어 뼈만 남은 난남이는 본 체 만 체한다. 이러한 행동 모두 김씨의 핏줄만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가 낳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몽실은 죽은 밀양댁과 북촉댁, 그리고 미군에게 몸을 팔아 살아가는 금년이를 생각하며 “여자라는 것 때문에, 어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엄마 몽실’이 아닌 ‘언니 몽실’만이 혈육은 물론이고 이념과 인종마저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권정생의 ‘몽실언니’는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아동문학의 틀로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는 의미도 크지만, 가족(특히 가부장)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의의를 부여받는 기존의 모성을 뛰어넘는 위대한 여성성을 제시한 작품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필요가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