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보사 대웅전과 요사채. 지보사는 경북 군위군 군위읍 상곡길 233에 위치해 있다.

해발 437미터의 선방산(船放山)은 마치 배를 띄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선방산 꼭대기에 배를 띄우고 놀 만큼 큰 못이 있었지만 당나라 장수들이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기고는 못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설화를 간직한 그곳에 지보사가 있다.

지보사(持寶寺)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할 뿐 그 이후 근대까지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그 옛날에도 그리 큰 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만 지보사에는 이름처럼 세 가지 보배가 있었다.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 맷돌과 사람 열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가마솥 그리고 청동향로이다. 향로 대신 단청의 물감으로 쓰이는 오색 흙을 꼽는 경우도 있지만 향로만 은해사 성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송홧가루 날리는 오월,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텅 비어 있는 주차장을 두고 극락교 앞 그늘에 차를 세운 후 다리를 건넌다. 큰 나무 그늘이 내 발등을 서늘하게 적셔주고 곧게 뻗은 길은 다시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을 좌우한다.”

계단 입구에 새겨진 글이 마음 밭을 돌아보게 한다. 첫 느낌이 가지런한 절이다. 계단 위에서 은행나무가 사천왕처럼 내려다볼 뿐 한낮의 풍경은 모든 게 멎어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은행나무 뒤로 아담한 루(樓)가 막아서는 작은 뜰, 한쪽에는 삼층석탑 하나가 투명한 햇살에 몸을 씻고 있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핀 불두화, 막 씻고 나온 듯한 순백의 얼굴빛과 마주하며 나는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무언가로 꽉 찬 절은 비밀의 화원처럼 조심스럽다. 저들만의 따스한 언어들이 두런두런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작고 경이로운 세계로 초대받은 이 순간조차 우연과 필연으로 예정된 약속이었으리.

불두화 한 그루 심고 잠들었던 어제 일을 떠올린다. 이토록 많은 불두화를 만날 운명이었을까. 종자를 맺지 못하는 애잔한 불두화, 그 순결한 아름다움에 빠지노라면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숨소리 낮춰가며 사진을 찍고 한참을 서성인다. 주지 스님이 어떤 분인지 뵙지 않아도 그려진다.

작은 소읍에 위치한, 적요처럼 말간 추억들이 꿈꾸듯 살아가는 절, 어디선가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나는 오월의 품에 안겨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별 기대없이 찾아온 내게 절은 빛바랜 고향처럼 푸근하다.

조각미가 뛰어난 고려시대 석탑, 보물 제 682호 삼층석탑의 시선도 부드럽다. 대웅전을 비켜나 두 단 아래 서 있지만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구석구석 시선 닿은 곳마다 부처님의 섬세한 눈길이 머물고 커다란 은행나무는 대웅전만큼이나 든든하다. 섬세함과 고요함, 소박함까지 갖춘 지보사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향수가 어룽거린다.

욕심 없는 평온함이 경내를 가득 메우는 이 시간, 현판도 없는 작은 루에 올라 시집을 읽으며 한껏 여유를 부리고도 싶다. 산 아래 정경도 궁금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조심스럽다. 절은 열린 듯 편안하고 비밀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햇살이 따가운 줄도 모르고 행복에 취해 마당을 거니는 이 소박한 특권은 누가 보내주셨을까. 작은 자갈돌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풍경이 간헐적으로 울다 멈추는 처마 아래에서 나는 한량없는 감사함에 젖는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키 재기를 하며 살아왔던 눈 먼 날들,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있어 지금의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 아는지도 모른다.

대웅전 법당에 들어가 석조아미타여래 삼존불 앞에서 백팔 배를 시작한다. ‘비록 적게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종무소 입구에 걸려 있던 글이 법당까지 따라왔다. 손에 잡히지도 않은 것들을 끝없이 좇으며 쉼 없이 달려왔던 가여운 내 육신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은 언제나 작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삼존불 옆으로 보이는 일타 큰스님의 인자한 미소가 빈 법당을 더 푸근하게 밝힌다. 법당 문 앞에 고여 있는 투명한 햇살, 더 이상 울지 않는 풍경, 모두가 숨을 죽이고 참선 중이다.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안기듯 자리 잡은 루(樓)의 처마 끝에는 빛바랜 염원들이 걸려 있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그 아래로 조금 전 내가 들어왔던,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출구가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면 출구는 다시 입구가 되어 바쁜 시간 속으로 이어지리라. 지보사에서 만난 오월의 말씀들은 까마득히 깊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아주 낮은 자세로 걸어오던, 작아서 혹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말씀들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지보사를 찾으리라. 내 안에 든 영원성을 잊고 만족할 줄 모를 때, 손 안에 움켜쥔 젖은 아픔들이 되살아날 때도 지보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나의 기도는 언제나 한결같기를 바란다.

“교만하지 않고 작은 일에 감사하며, 여름 풀냄새 같은 기도로 살아가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