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가난의 풍경과 나해철 시인

허름한 구멍가게에 앞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캄보디아의 할머니.
허름한 구멍가게에 앞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캄보디아의 할머니.

21세기 벽두. 빈자와 부자는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화려한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세칭 ‘명품 가방’의 가격이 곧 오를 예정이라는 뉴스가 나오자 아침부터 값이 오르기 전 그 가방을 사려는 사람들이 명품매장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그 일이 있기 불과 얼마 전. 생존의 위기에 몰린 수천 명의 소상공인들은 명품 가방 1~2개 가격에 해당하는 대출금을 신청하기 위해 은행과 관공서 앞에서 밤샘을 했다. 대부분 조그만 술집과 소규모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가난은 부끄럽지 않은 것”이지만 매우 자주 인간을 불편하게 한다.

또한 “단순히 돈이 많다는 건 자랑할 일이 못 된다”고 말하지만 가지고 있는 많은 돈은 어떤 인간이건 그를 우쭐하게 만든다. 누가 있어 이 사실을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빈부의 차이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살아가는 전혀 다른 삶은 한국에서만 목격되는 게 아니다. 유럽이건 아시아건, 아메리카건 아프리카건 전 세계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더불어 과거와 지금, 현재와 앞으로도 유사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영산포

나해철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달디 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강심을 높이고
황시리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

포구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은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
얼굴이었지
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
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하략)
 

▲알바니아와 캄보디아에서 마주친 빈곤

지금으로부터 9년 전쯤이다. 조그만 배낭 하나 메고 중동과 유럽을 여행하던 기자는 알바니아 듀레스에서 이탈리아 남부 해변도시 바리로 가는 배를 탄 적이 있다. 15시간의 항해로 아드리아해(海)를 건너는, 최소 1천여 명을 태울 수 있는 거대한 여객선이었다.

거기엔 침대와 이불 없이 맨바닥에 앉아 있어야 하는 3등석과 샤워실과 발코니까지 갖춘 1등석이 동시에 존재했다.

배가 출발하기 몇 시간 전부터 3등석 티켓을 사려는 승객들로 매표소 앞이 시장통인양 북적였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곤궁한 동유럽을 떠나 비교적 부유한 남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서 일거리를 찾으려는 이들이라고 했다.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도 적지 않았고, 허술한 옷차림의 엄마 품에 안긴 젖먹이 아기도 여럿이었다.

1등석과 특실 승객들은 그 난장판에서 훌쩍 비껴나 있었다. 비싼 티켓을 발권하는 창구는 한산했고, 1등석 티켓 구매자들은 3등석 승객들의 출입이 제한된 출구를 지나 편하게 배에 올랐으므로.

크메르의 고대 유적을 보기 위해 몇 차례 찾았던 캄보디아의 국경 도시 포이펫에서 목도한 한빈(寒貧)의 풍경도 기억 속에 또렷하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포장되지 않은 질퍽한 거리. 채 150cm가 될까 말까한 조그만 체구의 아주머니들이 자기 몸보다 5~6배는 커 보이는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특별한 기술 없는 캄보디아 육체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2~3달러에 불과하다고 들었다.

포이펫만이 아니다. 프놈펜과 시아누크빌 등 캄보디아 상당수 도시엔 오로지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장사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듯했다.

싸구려 음료수 몇 병과 과자 몇 봉지, 조악한 품질의 휴지나 비누 따위를 낡은 판자 위에 깔아 놓고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캄보디아 구멍가게 상인들이 벌어들이는 하루 수입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보잘것없을 게 분명할 터.

허름한 가게에서 맥주 서너 병을 청해 먼지 날리는 길에서 마실 때면 괜히 서글프고 마음 아팠다. 그런데, 돌아보면 알바니아와 캄보디아만이 아니었다. 한국 또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절대적 가난을 국민 대부분이 앓았다.

초등학생도 100만 원짜리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양이 아닌 질을 따지는 한국인. 그러나 그런 시절을 살아온 건 불과 얼마 전부터다. 인간에게 수치심과 자존심을 버리게 만드는 가난. 우리 역시 오랫동안 그런 세월을 살아왔다.

눈 맑고 선량한 인품을 가진 시인 나해철(64)의 절창 ‘영산포’가 그려내는 건 부정할 수 없는 30~40년 전 우리네 ‘가난의 풍경’이다.
 

캄보디아 포이펫의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
캄보디아 포이펫의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

▲웃음과 희망, 가난을 이기는 힘은…

한 세대 전 한국. 번성했던 포구가 쇠락을 길을 걸으면서 그곳의 젊은 여성들은 도시로 떠났다.

가난한 살림에 자기 입 하나라도 줄이고, 동생들의 연필과 스케치북을 사주기 위한 공장행. 비단 영산포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경상도와 충청도 시골 마을에도 그런 처녀는 흔전만전이었다.

울면서 마을을 떠난 누이들은 ‘빈손의 설움 속에 살아온 어머니가 묻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쉽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지 못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늘 같이 흐르고’ 누이는 철 지난 ‘개나리꽃처럼’ 시들어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누님은 오지 않았고,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누이를 아는 모두가 오래도록 소리 죽여 울 수밖에 없었던 시난고난의 세월을 우리도 지나왔다. 캄보디아나 알바니아의 서민들처럼.

그렇다면 가난은 인간의 모든 ‘존재 조건’을 박탈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현재의 한국을 보면. 그래서다. 빈곤 속에서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는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제넘지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태도, 결핍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우리 또한 그러했다”고.

앞서도 말했지만 가난이 자랑스러울 건 없다. 하지만 그걸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