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해마다 5월이면 조기(弔旗)를 내걸었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조기를 걸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후에는 4월에도 조기를 내다 걸었다. 작년에는 전남대 교환교수로 파견 나가는 바람에, 올해는 코로나19로 정신 놓는 바람에 4월의 조기게양은 무산됐다. 하지만 5월 광주를 어찌 잊을쏜가?! 더욱이 올해는 광주항쟁 40주년 아닌가!

작년 5월 17일 저녁에 광주 국립묘지를 찾았다. 25년 만에 찾은 망월동 묘역은 예전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학회에 갔다가 후배들과 함께 김남주 시인 묘지 앞에서 묵념한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으나, 장소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전남대 철학과 김양현 교수께 문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5·18 항쟁으로 산화하신 분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잠들어있는 김남주. 나는 그이가 없는 광주와 5월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날 밤 광주의 옛 도청과 금남로를 떠돌면서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전남대로 파견 나온 이유는 5.18 광주항쟁 때문이었다. 죄의식과 부채의식이 40년 세월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까닭이다.

부산 출신 대학원 선배는 1983년 매운 겨울, 광주와 남도를 떠돌다가 귀환했더랬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으면서도 광주를 찾아갔던 그의 심사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김남주의 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읽으면서 시대의 비극과 부조리를 깨달아갔던 시절. 60년대 김수영, 70년대 김지하, 80년대 김남주로 이어지는 시대의 저항자들로 희미하게나마 빛났던 시간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 아니라, 3김 시인’이었다. 망월동의 시인은 예전처럼 말이 없었다. 5월 3일 전남대 인문대 1호관에서 있은 ‘김남주 기념홀’ 개관식에서 환하게 웃기만 하고 침묵했던 것처럼.

1980년 5월 광주에서 40년 세월이 흘렀다. 내 머리에도 허옇게 서리가 내렸다. 기나긴 세월에 우리는 87항쟁과 직선제 쟁취, 1998년 평화적 정권교체, 2017-18년 촛불항쟁과 탄핵을 넘어서 3050클럽 가입까지 수많은 성취를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광주를 모욕하는 극우주의자들의 망동을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 발포 책임자는 반성하는 기미조차 없다.

진정한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은 발포 책임자와 그 후예가 광주항쟁에서 산화해간 영령들과 유가족에게 석고대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40년 세월 광주와 광주 시민들을 능욕한 극우주의자들을 정당하고 엄중하게 징벌해야 한다. 광주와 광주항쟁의 역사를 더럽히도록 더는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어린것들과 그들이 마주할 미래와 미래기획을 위해서도 광주와 광주항쟁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잘못된 과거와 작별하려면 대낮처럼 깨어있는 정신으로 과거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마 같은 살인자들과 그 후예가 다시는 설레발 치지 못하도록 역사의 관에 ‘탕탕’ 소리 나게 대못을 두들겨 박아야 한다. 미래는 과거의 처절한 기억과 살을 도려내는 고통의 환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광주항쟁 40주년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