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진<br>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
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코로나19가 다소 소강상태였는데 갑작스런 유흥업소 전염이 다시 긴장감을 가지게 한다. 그럼에도 집안에서 장기간 움츠린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주말 근교 나들이 차량들이 도로에 점점 늘어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시점엔 상습 정체지역이 오히려 차량 속도가 빨라지는 듯했다. 모임 연기 같은 사회적 속도가 느려지니 이동 흐름은 빨라지는 기현상이다. 그 기간 차량속도 변화에 대한 측정 자료가 있으면 코로나 전후 사회적 변화 현상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경찰이 최고 시속 100㎞의 고속도로 주행속도를 시속 110㎞로 상향조정한 적이 있다. 100㎞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 민심을 반영해야 했다. 나날이 성능이 좋아지는 승용차로 고속도로에서 시속 110km로 달리더라도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은 단속카메라를 벗어나면 울분을 발산이라도 하려는듯 총알처럼 날아간다.

그런 광기를 달래기 위해 ‘구간단속’이라는 날렵한 방패를 세웠지만 여전히 역부족이다. 규정 속도로 주행 중인 내 차량 앞을 추월하여 쌩 내달리는 차를 본다. ‘×친 놈’이라는 상스런 말이 부지불식간에 툭 튀어나온다. 조금 느리게 가는 차가 내 차 앞을 주행하는 것에는 심한 더딤을 느낀다. ‘남녀가 노닥거리며 가는 것 같다’라는 근거 없는 빈축의 중얼거림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속도 병에 걸려있는 것이다. 모든 운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주행속도는 없는 것 같다. 주행속도는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문제다. 준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세상이 워낙 빨리 내달리니 뒤처질세라 너도 나도 내달리는 속도전이 가속화돼 왔다. 외국인들이 ‘빨리빨리’라는 말을 한국인의 속성을 대변하는 말로 여길 정도니 우리는 속도전에 강한 민족임은 맞다. 신속성의 무기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일 수도 있다. 퀵서비스와 ‘배달의 민족’ 시스템이 신성장동력으로 자리 잡은 것도 한국인의 신속성 취향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 ‘좀 더 빨리’는 모든 경제활동의 구동력이 된 지 오래다. 신속성은 정확성과 충돌하게 된다. 건물붕괴, 다리붕괴, 지하철화재, 세월호사건과 같은 것도 신속성이 정확성을 짓누른 결과가 아닌가 싶다. 도로의 주행속도를 늦추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학교 앞, 노인보호구역 등 속도가 안전을 집어삼키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다.

느림의 지혜를 되돌아보게 된다. 바쁜 일상을 당연히 여기던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퇴임 후의 일상이 다소 느려진 듯하다. 시속100㎞ 이상으로 내달리던 삶이 절반으로 뚝 떨어진 시속 50㎞ 생활이 되었다. 이렇게 느리게 달려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아직도 남아있다. 내 삶의 속도 병이 다 나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코로나19로 세상의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 빨리 회의하고, 빨리 물건 만들고, 빨리 돈 벌고 등등. 모든 일들이 뒤로 미뤄지거나 취소된다. 지구촌이 느려지고 있는 상황이다. 모두가 느려지면 느려진다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치열한 생존 현장에서 벌어지는 탈(脫)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감속운행도 좋은 묘수다. 뒤처진 자에게 희망을 주는 찬스가 될 수 있다. ‘천천히’를 약속하고도 다른 사람이 쌩하고 추월하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