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시기와 김광규 시인

어두움 내린 항구에 정박한 낡은 배가 그려내는 풍경은 중년의 쓸쓸함과 닮았다.
어두움 내린 항구에 정박한 낡은 배가 그려내는 풍경은 중년의 쓸쓸함과 닮았다.

중년은 40~50대를 지칭하는 단어다. 묘한 시기다.

20대들 앞에선 “나도 아직 젊어”라고 하기에 부끄럽고, 노인들을 향해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고 말했다간 핀잔을 먹게 되는 나이.

모험과 도전에 방점을 찍고 무모하게 훌쩍 먼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젊은이도 아니고, 골방에 틀어박혀 시린 무릎을 스스로 주무르며 옛날이나 추억하는 늙은이도 아닌 중년. 용기는 사라지고, 지혜는 아직 모자란 어중간한 시절.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기자는 바로 이 중년의 한가운데를 살고 있다. 학교와 직장 등에서 만난 친구들도 비슷한 연배. 가끔 모여 세상의 화제를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기울일 때면 이야기의 주제나 소재가 청년 시절과는 판이하다는 걸 느낀다.

중년이 된 이들이 낯선 외국에서 하루 15시간 버스를 타고 떠도는 배낭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에 대해서도 더 이상 주절주절 하지 않는다. 그러면 매너리즘 속에서 겨우겨우 견디고 있는 생이 더 피곤하고 귀찮아진다.

보통 중년들의 술자리 이야깃거리란 새로 바꾼 자동차의 좌석이 얼마나 쾌적한지, 이른바 일류 대학에 들어간 자식이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지, 사놓은 주식이나 시골 땅의 시세가 얼마나 올랐는지 등일 경우가 흔하다. 주위를 돌아보면 이게 과장이 아니란 걸 단박에 알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2천500년 전 공자는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이걸 요즘 세대가 사용하는 문장으로 풀어보면 대충 이런 이야기다.

“남이 너를 알아주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가 남을 알지 못함을 경계해라.”

참으로 근사한 말이다. 사실 중년이라면 이 정도 사람의 도리는 깨닫고 실천해야 맞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게 결코 쉽지 않다.

▲세상, 저항과 극복의 대상에서 이해와 해석의 대상으로

중년보다 훨씬 젊은 청춘들에게 세상은 저항과 극복의 대상이다.

일렁이는 조그만 파도에도 뒤집힐 것 같은 쪽배에 몸을 싣고 거대한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항해를 떠날 용기가 그들에겐 있다.

육체는 물론 그 육체에 탑재된 정신까지도 한없이 뜨겁고 건강한 시절. 그들에겐 세상이 무섭지 않을 터. 청년에겐 끝을 알 수 없는 짙푸른 바다가 모험 가득한 세계의 낭만적인 은유로 보일 것이다.

청년이 막 항구를 떠난 신형 선박이라면, 중년은 부표 없는 거친 바다를 떠돌다 지쳐 포구에 정박한 낡은 배다. 지나온 항해의 힘겨움을 알기에 앞으로 넘어야 할 파도가 두려운 선원의 심정은 중년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처럼 빼어난 현인(賢人)이야 경험의 축적 속에서 나이 들어가며 겸양과 덕을 쌓아가지만, 보통의 사람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야속하고 미울 뿐이다.

앞서 언급한 ‘학이 편’의 문구를 눈앞에 가져다 펼쳐줘도 “아직도 내가 누구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는데, 왜 다른 사람들 사정까지 헤아리고 살아야 하나?”라는 투정이 나올 게 뻔하다. 그러면서도 괜스레 부끄러워할 것이다. 남들이 나잇값 못한다고 손가락질 할까 싶어.

거듭 말하지만 청년에게 세상이란 극복과 저항과 대상이다. 그 시절이 지나면 누구에게나 중년이 온다. 그때가 되면 세상은 이해와 해석의 대상으로 모습을 바꾼다.

시인 김광규(79)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40년 전쯤 김 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를 쓴다. 그가 중년에 들어섰을 무렵이다.

 

중년들은 조그만 배에 올라 망망대해를 떠도는 청년의 용기가 부럽다.
중년들은 조그만 배에 올라 망망대해를 떠도는 청년의 용기가 부럽다.

▲스스로를 용서하고 이해한다면 중년의 삶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오래된 회색 판화와 닮았다. 행간의 의미를 곱씹을수록 우울해진다. 초반엔 빛나는 청년의 나날을, 뒤에는 이와 대비되는 중년의 비루한 오늘을 너무나 명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상사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던’ 청년의 시간이 지나고 원하지 않았음에도 중년이 된 사내들.

한때는 차가운 방을 자신들의 체온으로 덥히던 그들. 쏜살처럼 흘러버린 세월은 그들을 아래와 같은 슬픈 노래나 합창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그리고…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서/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게 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대책 없이 나이 먹어가는 걸 서글퍼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면 영원한 청년은 세상에 없고, 청년시절 없이 생겨난 중년도 없다. 그렇다면 이 중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게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세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자신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 허술하고 하찮을지라도 제 삶을 따스하게 포옹하는 것. 그래야 마음이라도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 땅의 모든 중년이 공자처럼 ‘온갖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하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들만 사는 세상은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기에.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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