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재 작년에 모친이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짜증과 신경질, 감정 변화가 극에 달했다.

누군가에게 속 얘기를 하고 싶은데 자식이나 남편은 싫다고 했다. 오랫동안 계 모임을 해온 친구들이 있지만, 속 얘기는 털어놓을 사이가 아니란다. 모친을 도울 방법을 찾다가 지역 상담소가 떠올랐다. 몇 군데 알아보니 집 가까이에 상담하는 곳이 있었다. 처음에는 전화로, 두 번째는 방문해서 소장에게 상담 절차와 비용을 들었다.

상담 비용이 중국집 메뉴판 같았다. 8만 원, 10만 원, 12만 원. 팔보채, 유린기, 샥스핀이 나오는 코스요리처럼. 석사 급, 박사 급, 교수 급으로 나눠지는 듯했다.

비용이 부담스러웠지만, 모친을 위해 8만 원 하는(?) 상담사로 총 5회 상담코스를 골랐다. 원래는 주 1회 10회 코스인데, 5회를 먼저 해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 모친은 비용 얘기를 듣더니 펄쩍 뛰었다. “한 시간 내 얘기 들어주는데 8만원?” 어찌어찌 모친을 달래 상담을 시작했다. 첫날은 내가 고이 모시고 갔다가 모시고 왔다. 모친에게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낯선 상담일 테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담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5회 상담을 끝낸 모친은 “속이 다 시원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자식이나 남편, 친구에게 못하는 얘기를 상담사에게 마음껏 하고 나니 살 것 같단다. 아, 상담이란 게 이런 거구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맞구나. “한 번 더 할래요?” 물었더니, 이번엔 거절하지 않는다. “나중에 하지, 뭐.” 그렇게 모친의 우울증은 심리 상담을 통해 봄날 봄바람처럼 보드라워졌다. 그러던 차에,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예술인 지원 상담을 해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도대체 모친이 어떤 경험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중년의 무게감을 느끼던 차에 덜컥 신청했다.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지원 연락이 왔고, 나는 참마음심리상담센터 문가인 원장과 주 1회 12회 코스로 상담을 받기로 했다.

3월 첫 번째 상담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문가인 원장의 성격이다. 그녀는 내가 상담사에게 가졌던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일 거라는 묵은 선입견을 완전히 깨주었다. 단도직입, 직설, 명랑, 소탈한 상담사였다. 그동안 내가 책과 영화에서 만나 온 상담사는 현실의 상담사가 아니었다. ‘오길 잘했구나. 좋은 경험이 되겠어.’ 그녀는 중년의 고비를 막 오르고 있는 내 삶의 방향과 성격에 대해 듣고 호탕하게 조언해주었다.

567개짜리 문항 MMPI-2 심리검사도 받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여성성’이 굉장히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카를 구스타프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를 여기서 듣다니. 내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을까. 겉으로는 남자답게 과격하게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움츠리고 상처받았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상담소를 나서며 문득 고갱의 그림이 떠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