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미회사원
박현미회사원

수년 전, 고전 열풍을 타고 인문학 붐이 대한민국을 들썩였다. 책방에는 관련 서적이 넘쳐났고 나 역시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고전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고전을 처음 손에 잡기 시작한 이유는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솔깃한 구절을 본 다음이었다. 대표적 인물로 조선 시대 권율 장군은 고전을 파고든 뒤, 마흔이 되어 벼슬자리에 나갔다고 한다. 늦은 관직 진출이었지만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자 문신이 아니던가? 100세 시대인 요즘, 나 또한 늦지 않았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똑똑해지고 싶었고, 말도 잘하고 싶었다. 난처한 상황에서도 빠른 상황 판단과 임기응변으로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었다. 지금 하는 일에 지성이라는 무기를 더하여 비상하고 싶었고, 궁극적으로 팍팍한 세상살이가 고전 읽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수월해지길 바랐다.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 지혜로운 삶과 정신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것이 고전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처음에는 책에서 소개하는 추천도서 목록을 참고해 무턱대고 고전을 읽어 나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솝우화를 읽는 내내 미궁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수십 세기가 지나도록 살아남은 천재들의 책은 오르기 힘든 견고한 벽처럼 상상 이상으로 문턱이 높았다. 궁즉통이라 했던가? 내 바람은 결국 고전을 함께 읽는 모임을 통해 이뤄졌다.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통해 위대한 사상과 인물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내게도 활짝 열리는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은 경이롭다. 새롭고 깊은 울림은 기분 좋은 두통을 선사하기도 했다. 한 번 읽고 그만두지 않고 거듭 반복 읽기로 같은 고전을 한 번 더 읽을 때 새로운 해석을 발견하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전과 다른 나, 한 뼘 성장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고전은 우리에게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바른 삶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해준다. 어떤 잘못된 경험을 직접 반복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아픔 없이도 지혜롭게 삶의 교훈을 선물해 준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바른 선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고전을 공부하는 목적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고전은 삶의 진짜 문제, 가장 깊은 관심사를 다룬다. 기쁨, 아픔, 두려움, 사랑, 증오, 용기, 분노, 죽음, 믿음,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들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갈등과 문제는 늘 우리 속에 있는 것이니, 고전을 읽고 토론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장 깊은 부분을 직면하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는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미래를 저당 잡히지는 말아야 하며 삶의 현장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 인문학의 핵심은 휴머니즘이다. 내 기쁨도 중요하지만 타인에게 기쁨을 줄 때 우리는 더 행복하고 삶의 기쁨은 두 배로 늘어난다. 나와 타인의 행복을 위한 인문학 정신이 퍼져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밝고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기성세대를 포함, 나 역시 얼마나 꽉 막힌 사고를 하며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살아가고 있는가? 초, 중, 고 교육을 마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대학에 떨어지거나 진학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시련이자 패배로 치부한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나온다 해도 좋은 직장을 잡는 일, 연봉을 높이는 일을 위해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다. 스펙은 결코 인문학적 성찰을 요구하지 않는다. 외국어를 꾸준히 해야 하며 미래를 위한 자격증도 두어 개는 따 놓아야 덜 불안하다. 그래야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세월을 허비하며 헛된 힘을 쏟을 뿐이다. 물질로 내 존재를 증명해 내야 하는 사회의 근본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런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잉여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저변에 깔린 탓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인문학이 절실하다.

인문학은 내게 속삭인다. 대단하고 심오한 사유로 홀로 서 있기보다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하며 함께 살라고. 먹고 살만큼의 부에 자족하고 넓은 아량으로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며 살되 독립적이고 선한 의지로 살아가라고. 벌어도, 벌어도 모자란 물질문명에 속지 말고 깨어 있어 행복하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