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한나 아렌트와 아돌프 아이히만을 떠올리다

프라하 성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붉은 기와가 인상적이다.
프라하 성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붉은 기와가 인상적이다.

◇ 바르샤바를 떠나 크라쿠프로

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로 향했다. 비가 온다. 다행히 크라쿠프 숙소에 도착하고서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내는 나가기 어렵겠다. 오는 길에 잠시 스칼라성에 들렀고 엉뚱한 곳을 숙소로 착각해 헤매기도 했다. 주행 중 문제는 없었다. 이 상태만 유지하면 된다. 로시를 수리하느라 리가와 바르샤바에서 시간과 경비를 예상보다 많이 써버린 탓에 나머지 일정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포르투갈까지 갔다가 스웨덴, 핀란드로 해서 다시 러시아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는 여정이니 물가가 비싼 곳에선 아쉽지만 체류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크라쿠프로 내려온 이유는 이곳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기 위해서다.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히틀러와 나치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을 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광기가 집단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토록 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는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프라하 구도심에 있는 카프카 기념관.
프라하 구도심에 있는 카프카 기념관.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가진 악은 선함보다 훨씬 더 끄집어내기 쉽고 또 힘을 키우기 쉬운 듯하다. 특히 독재자의 시대에선(우리도 마찬가지 시대를 지나왔다) 악의 평범성은 너무나 쉽게 일상이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 중 한 사람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의 중령으로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학살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가족들과 아르헨티나로 몰래 이주해 이름을 숨기고 살다 이스라엘 정보국에 체포되어 재판받았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이 어떤 가공할 결과를 초래하는지, 서로 죽고 죽이는 폭력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아이히만의 사례는 잘 보여준다.’

크라쿠프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기도 하다. 시내에 가면 그의 법랑냄비 공장이 있다. 오스카 쉰들러도 나치당원이었으나 그는 자신 공장에서 일하던 수용소에서 데려온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1천2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구했다. 선과 악은 공존하지만 악은 ‘평범’만으로도 그 해악의 경계가 없고 용기를 내어야만 하는 선은 그 수고에 비해 이로움을 내기 힘든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선한 사람이 되기 힘든 것이겠지.

◇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다

개인 방문자는 아침 일찍 가야한다는 말이 맞았다. 단체로 아우슈비츠를 찾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가이드 해설 없이 관람하려면 오전 9시 이전에만 가능하다는 이야길 들었다. 숙소에서 7시에 나와 아침 8시 30분이 되기 전에 도착했다. 그 시간에도 주차장엔 버스들로 가득했다. 여권을 보여주고 무료입장권을 얻었다. 들어가기 전 가방이나 큰 소지품은 유료 보관소에 맡겨야 했다.(헬멧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주차장 입구 큰 도로에는 유대인을 실어 나르던 기차 선로가 놓여 있고 수용소는 이중 철망 속에 붉은 벽돌 건물들이 20여동 나란히 서있었다. 수용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걷어내고 현재의 풍경만 놓고 보면 한적한 시골에 있는 오래된 작은 대학 캠퍼스 같은 느낌이다.(원래 이곳은 폴란드군의 병영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상상도 못할 만행이 자행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철저하게 산자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장치들이 곳곳에 있었다.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내부.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내부.

수용소와 수용소 건물 사이에 만들어 놓은 총살 집행장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쳐 울리도록 했다. 바로 옆 지하 감방은 소련과 폴란드에서 잡혀온 사상범들을 대상으로 가스 실험을 했던 곳이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절망만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다.

보헤미안(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집시)을 가뒀던 수용소 건물에 전시된 두 손가락을 합쳐놓은 크기의 작은 수첩에 빼곡히 적힌 글자가 살아남은, 기록을 남겨 기어코 그 시절을 버텨 지금까지 살아있는 영혼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작은 규모의 수용소에서 그 많은 유대인과 집시, 히틀러에 반대하는 이들을 죽이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고 바로 옆 화구 속에 시체를 밀어 넣어 태웠다. 전쟁은 언제나 인간을 광기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임을 망각하게 만든다. 평화의 길을 두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추기는 이들은 대부분 타인을 희생해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연장하려는 이들이다.

프라하까지 달려 저녁 무렵 도착해 자정이 되도록 시내를 쏘다녔다. 슬리퍼 신고 심카드 사러 나갔다가 그 길로 프라하 성부터 카를교 일대까지 모두 돌아본. 덕분에 카프카 기념관 위치도 확인했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 바츨라프 광장에서 쿠델카를 따라 찍다

바츨라프 광장을 찾았다. 1968년 8월 어느 날, 민주화를 열망했던 프라하 시민들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쫓겨났다. 소련군들은 광장 가로수 그늘 밑에 탱크를 두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겁박했다. 정적이 깔린 광장을 바라보고 젊은 사진가 쿠델카는 6시 3분을 가리키고 있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파인더 안에 넣고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그는 프라하는 떠났다.

그가 사진을 찍었음직한 건물을 찾았다. 그 위치엔 ‘뉴요커’라는 의류 매장이 있었고 여름휴가를 위해 신상 수영복을 찾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2019년 6월, 나는 그의 사진을 오마주하기 위해 매장 창가에 서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런…. 고장난 시계를 리가에서 다른 짐들과 함께 집으로 보내버렸다는 걸 잊고 있었다. 결국 뉴요커에서 시계를 20유로쯤 주고 단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샀다. 40년이 훌쩍 지난 바츨라프 광장엔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하다. 새 시계의 시각은 12시 57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카프카 기념관으로, 레논벽으로 어젯밤 걸었던 길을 역순으로 돌았다. 책방 두 곳을 구경했고 지인들에게 보낼 엽서를 샀다. 엽서는 프라하에서 샀지만 소인은 프랑스 어느 도시 것이 찍힐 듯하다.

죽음을 앞둔 카프카는 자신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맡기며 모두 불태워달라고 했다. 나는 그게 항상 궁금했다. 그토록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면 왜 스스로 없애지 않았는지.(나 같으면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고 그렇게 했을 듯)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맞았던 바츨라프 광장. 이곳에서 사진가 쿠델카는 유명한 사진을 남겼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맞았던 바츨라프 광장. 이곳에서 사진가 쿠델카는 유명한 사진을 남겼다.

유언과는 다르게 친구가 자신의 원고를 제대로 평가해줄 것이란 믿음과, 또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강했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복선과 다의의 단어를 쓰기 좋아했던 카프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아니면 마무리 짓지 못한 작품들에 대한 결백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기념관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았고 ‘성’의 줄거리를 짧게 영상으로 옮긴 것을 혼자 여러 번 보았다.

그는 언제나 떨쳐버릴 수 없는 아득한 절망에 짓눌린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건 태생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살았던 시대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독일, 오스트리아….

어디로 갈지 아직 행선지를 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