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이 났습니다. 팔다리가 쑤시고 기침도 납니다. 금세 나을 거라며 지인이 한의원을 소개해줍니다. 사흘 치의 약만 쓰면 된다는 선생님의 호언과는 달리 기침이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치료제를 쓰는 건 더 이상 의미 없으니 보약으로 바꿔 보잡니다. 다 낫지도 않았는데 원기 회복제로 몸을 다스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조심스레 여쭙니다. 염증을 가라앉힌 후에 약재를 쓰면 좋지 않겠느냐고. 순간, 의자에 앉은 선생님 엉덩이가 들썩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여기서 진료를 끝내겠다는 신호입니다. 떼밀리듯 집을 향하는데 뭔가 서럽습니다.

여기까진 제 입장이고 의사선생님에게 감정이입해 봅니다. 남들 다 쉬는 토요일 오후, 피로감을 몰아내며 진료실을 지킵니다. 마지막 환자까지 나름 최선을 다해 상담하고 처방해줬건만 당사자가 그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살짝 심기가 불편해지며 휴식이 그립습니다. 자제심을 놓치고 환자에게 속내를 비치고 맙니다. 신발을 돌려놓듯 이렇게 바꿔 생각하니 별일도 아닙니다.

현관문을 들어섭니다. 정말이지 신발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습니다. 앞코가 까진 보라색 등산화와 뒤축 닳은 에나멜 단화를 지나, 느슨하게 묶은 밑창 말랑한 운동화와 굽 높은 철 지난 갈색 부츠까지 식구들 개성을 말해주는 신발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저린 발바닥을 달래가며 하루를 저벅댄 고단함이 묻어있고, 흔전하게 배었다 서서히 말라가는 땀 같은 연민이 서린 저 신발들. 살아낸 날들의 구차한 추억과 살아갈 날의 막연한 희망이 교차로처럼 엎어지고 포개져 있습니다. 아픈 것 잠시 내려놓고 한 켤레씩 간수합니다. 신발코를 현관문 쪽으로 돌려놓으면 신발정리는 끝이 나겠지요. 한 호흡의 짧은 시간이지만 역지사지하는 순간입니다.

신발을 돌려놓는 마음은 한 청년에게서 배웠습니다. 잠시 잠깐 아들의 과외 선생님이었던, 갓 스물을 넘긴 풋풋하고 선한 대학생 말입니다. 방문 첫날,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선생님은 자신의 벗은 신발을 현관문 쪽으로 가지런히 돌려놓는 거예요. 손님을 배려해 집주인이 신발코를 돌려놓는 일은 봤어도 방문객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냥 들어오시라고 해도 싱긋 웃기만 할 뿐 매번 그렇게 하더라고요. 제 상상력이 미치지 못했던, 젊디젊은 청년의 역지사지 매무새가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더군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아이 선생님으로서도 최고였음은 첨언할 필요조차 없지요. 자기관리를 하는 동시에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습관화 된 청년 같았습니다. 신발을 단정히 돌려놓던 첫 모습에서 그런 모습이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요. 자신을 갈고닦아 예의와 염치를 실행하는 마음. 섬세한 결을 지닌 청년의 역지사지를 보면서 한동안 자기반성 모드가 되곤 했지요.

역지사지가 덜 된 제 실수담이 떠오릅니다. 역시 신발에 관한 것이군요. 시각장애인 봉사 모임에 동참한 적이 있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짝을 이뤄 야외 나들이를 갔지요. 제 짝지는 초로의 신사분이셨어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였지요. 초보 봉사자인데다 덜렁이인 저는 짝지의 신발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짝꿍의 신발 정도는 가뿐히 챙기는 다른 봉사자들에 비해 저는 우왕좌왕 헤맸지요. 난감해하는 저를 보고 베테랑 봉사자가 도와줘 신발을 찾긴 했어요.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소설가

하지만 부끄러움은 온전히 제 몫이었습니다. 짝지가 신발을 벗을 때 도와드리긴 했지만, 그 분의 신발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깨치지 못했어요.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봉사하는 행위에만 제 마음의 방점을 찍었던 거예요. 행위만 앞섰지 그들 입장에 대해 숙지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신발을 돌려놓는 마음의 수련이 있었더라면 짝지의 신발을 기억하는 것쯤이야 유쾌한 과제가 되었을 텐데 말예요.

일본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도 구두를 돌려놓는 장면이 두어 번 등장합니다. 현관을 들어설 때면 맏딸 요코는 벗은 자신의 구두를 바깥 방향으로 가지런히 되돌려 놓습니다. 신발을 돌려놓는 작은 일이야말로 세상사 소중한 그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자기 훈련이 필요하고, 잘 다져진 그것은 역지사지로 연결되어 좋은 기를 발산한다고 의미 부여하곤 했지요.

덧놓이고 흐트러진 신발들을 다시 갈무리합니다. 피로처럼 달라붙은 뒤축의 젖은 흙을 털어내고, 통증처럼 내려앉은 신발 웅덩이 속 먼지도 닦아냅니다. 신발코가 현관 쪽으로 향하도록 한 켤레씩 돌려놓습니다. 신발들 금세 새초롬하니 단정해집니다. 신발을 돌려놓는 작은 행위는 자기수양을 구하는 안으로의 수렴이자 타자이해를 실천하는 외적 발산입니다.

분별하려는 마음이 돋을 때마다 신발 돌려놓기를 생각합니다. 포개지고 헝클어진 마음의 코를 바깥쪽으로 향합니다. 결코 표 끊은 적 없지만 역지사지라는 삶의 환승역에 닿은 느낌입니다. 한결 가벼워진 덕분일까요. 약으로도 낫지 않던 통증이 점점 잦아드는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