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너는 온다. (….)”

과연 여기서 ‘너’는 누구일까, 또 무엇일까? 사람마다 마음속에 이런 ‘너’ 한 명, 또는 하나는 꼭 있다. 인용 글은 이성부 시인의 ‘봄’의 일부이다. 시인의 시상처럼 산을 옮겨놓아도 깨지질 않을 정도로 얼음이 꽝꽝 언 강에도 봄은 얼음을 달래어 버드나무를 타고 온다.

곡우(穀雨)가 지난 자연과 들판에는 봄이 한창이다. 봄이 지천인 산과 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분주함이다. 철없는 인간 세계와는 달리 자연은 절기(節氣)에 맞는 일을 하느라 분주하다. 그 모습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러움의 동의어는 균형감이다. 자연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한 자연과는 달리 인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개발주의 신화에 도취 된 인간들은 그것을 모른다. 1㎜도 안 되는 바이러스에 숨 쉴 권리조차 빼앗겨 버린 게 인간 현실이지만, 망각이라는 만병통치약을 가진 인간은 바이러스를 정복하겠다며 또 야단법석이다. 인간의 망각은 어제의 기억을 오늘도 아닌 어제에 지워 버리는 힘을 가졌다. 바이러스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유통기한을 앞당기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인간 몸속에서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전 멸망(종)의 제일 확실한 방법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자기 멸망(종)이다. 외부에 의한 붕괴는 재건(생)의 여지를 남기지만, 내부에 의한 붕괴는 그런 여지조차 없다. 그러기에 없어져도 흔적도 없이 확실히 사라진다. 자기 멸망(종)의 촉매제는 모든 감각을 자기한테만 집중시키는 자아도취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공감 능력 상실이다.

“자기도취적 리더”라는 말을 보고 필자는 선거가 떠올랐다. 필자는 선거 결과에 만취된 이들이 더더욱 자기도취에 빠져 영원히 헤어나지 않기를, 그래서 최대한 빨리 사라져 주길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래야 교육을 그들의 편협한 이념의 눈으로 재단하지 않으니까!

“EBS 수업만 듣고, 학교 선생한테 배우지도 않은 과제를 하고, 저게 무슨 학교 수업이고. 저렇게 할 거면 나도 선생질하겠다. 저거는 사기다, 수업 사기.”

퇴근 무렵 잠시 들른 휴게소 식당에서 “2차 온라인 개학 출석률 99%, 접속 문제 있었지만, 즉각 조치”라는 어느 방송사의 뉴스를 보면서 작업복 차림의 어느 손님이 한 말이다. 수업 사기(詐欺)라는 말이 너무 크게 들렸다. 주문한 음식을 손도 못 대고 필자는 사기라는 말이 양심에 걸려 그 자리를 빨리 떴다. 운전하는 내내 “학교 수업 사기”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많은 학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온라인 수업은 학교 수업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학생은 없고, 교사 편의에 따라 진행되는 온라인 수업들! 위에서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교사들의 말은 변명조차 안 된다. 지금 하는 온라인 수업이 출결을 위한 “수업 사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업 본질에 가까운 수업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학생들이 기다리는 학교의 봄이 온라인 수업을 타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