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폴란드에서 며칠 머물다

바르샤바 중심가 풍경.
바르샤바 중심가 풍경.

◇ 구세주, 페트롤헤드스의 미치아이와 도미니크

에바 씨에게 소개받은 ‘패트롤헤드스’에 다녀왔다. 패트롤헤드스는 바르샤바 시내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외곽 낡은 창고에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옆에는 생활폐기물 처리장이 있다. 그냥 버리기 어려운 쓰레기들을 신고하고 와서 처리하는 모양이다.

냉각팬은 회생불능 판정을 받았다. 합선으로 모터가 탔다. 왜 합선이 되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교체를 해야만 하는 상황. 지금까진 임시조치해서 타고 왔으나 이제 그럴 수 없다. 부품을 새것으로 바꿔야만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미캐닉 미치아이 씨에게 “내 오토바이가 문제가 많다”고 하자 웃으며 “BMW잖아”란다.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바르샤바 중심가엔 한국 기업 광고판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르샤바 중심가엔 한국 기업 광고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첫 번째 사고의 원인은 나의 부주의였고, 쿨링팬이 멈춘 건 출고된 지 10년이 넘었으니 슬슬 노후화된 부품들이 문제가 생길 때가 된 것일 수도.

이왕 뜯는 김에 이곳저곳 문제가 없는지 점검했다. 출발하기 전에 교체했던 에어필터는 곤충들과 이물질로 엉망이었고, 구석구석 온갖 날벌레들이 끼어서 지저분한 상태. 흙투성이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쿨링팬 교체 때문에 결국 바르샤바에서 또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문제들까지 해결이 된다면 뮌헨은 가지 않아도 된다. 이번 주는 꼼짝할 수 없을 듯.

미치아이 씨와 도미니크 씨는 세상일은 별 관심 없는 듯 오토바이만 만지며 사는 미캐닉이자 라이더인 듯싶다. 버스를 타기 위해 마을로 한참 걸어나가다 지갑에 유로화 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돌아가 미치아이 씨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 부탁했다.

폴란드는 유럽연합에 속해 있지만 자국 통화를 사용한다. 숙소까지 약 30분 46즈워티(약 1만6천원)이 들었다. 카드 결제. 우리와 택시 요금이 비슷한 듯하다.

 

수리하기 위해 카울(외장 덮개)를 벗겨 놓은 로시. 러시아에서 고장났던 부품들도 교체하기로 했다.
수리하기 위해 카울(외장 덮개)를 벗겨 놓은 로시. 러시아에서 고장났던 부품들도 교체하기로 했다.

◇“오토바이 정도는 반드시 있었으면 한다”

K선생님은 결국 포기하고 귀국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신 듯하다. 5월 12일 유라시아 횡단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동해항에 모인 사람은 나까지 포함해 6명. 바이칼에 도착하기 전부터 K선생님의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길 들었다. P선생님께 앞 서스펜션 오일이 새서 완전히 내려 앉아 고생 중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선생님은 아직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했다. 같은 날 유라시아 횡단을 떠난 사람들끼리 위치 공유앱을 깔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다.

바르샤바에서 만난 H선생님은 지난해 러시아 모고차 근처에서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어 포기하고 올해 다시 도전하셨다. 선생님 오토바이는 구입한 지 1년 남짓 되었는데 문제가 생겨 BMW 본사가 있는 뮌헨으로 가신다고. 원래 함께 가려고 계획했지만 뜻밖에 냉각팬 문제가 생겨나는 바르샤바에 남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먼 거리를 달려야하니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누군가는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안전이 먼저.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에선 체력을 유지하고 여유를 잃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토바이는 고장 나면 어떻게든 고치면 되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여유를 잃으면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모두 건강하게 목적지까지 갔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길.

 

모터가 타버린 냉각팬. 냉각팬이 돌지 않으면 엔진 온도가 금방 높아지기 때문에 주행할 수가 없다.
모터가 타버린 냉각팬. 냉각팬이 돌지 않으면 엔진 온도가 금방 높아지기 때문에 주행할 수가 없다.

지하철을 타고 중심가에 나가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다녔다. 밤 10시쯤 되어서야 해가 넘어가니 오히려 저녁에 돌아다니기 좋은 듯하다. 낮에는 워낙 덥고 햇살이 뜨거워 그늘이 아니면 금방 땀범벅. 내일쯤 수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연락을 받기로 했다. 지금 있는 숙소에서 우선 4일 더 있기로. 장기투숙(?)이라 요금을 깎아준 듯. 3박 추가요금이 65즈워티(약 2만원).

도미니크 씨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숙소에 꼼짝 않고 있었다. 가만히 늘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몸이다. 내 주변의 상황들이 몸을 쓰게 만들 뿐. 애써 무엇을 해야 한다든가 억지로 부지런을 떠는 건 딱 질색이다. 가장 중요한 건 재미다.

재밌으면 부지런해질 수도. 자신의 깜냥에 넘치게 ‘애써 억지로’ 무슨 일이건 하다보면 상처 입고 균형을 잃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씩 철들고 부턴 그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가끔 에너지가 넘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이를 만나면 ‘훌륭하신 분이구나’ 생각하지만 쉽게 피로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로를 주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항상 다짐한다.

지금껏 내게 재미를 주었던 것들을 꼽아보면 주로 ‘기계류’였다.

오토바이는 잘 만든 기계이기도 하고 빨리 달리고픈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이동수단이기도 하다. 몸을 드러내고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하는 오토바이는 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 위험은 언제나 불시에 찾아온다. 균형이 깨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그 순간 아드레날린이 대폭발한다는 건 아이러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취미 있는 인생’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토바이가 차보다 위험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지금은 제대로 된 답을 내기 힘든, 내더라도 의미가 없는 시대다. 말하자면 이미지에 빠져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남자가 남자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야말로, 오히려 오토바이 정도는 반드시 있었으면 한다.”
 

패트롤헤드스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바르샤바는 대중교통이 잘 연계돼 있어 편리했다.
패트롤헤드스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바르샤바는 대중교통이 잘 연계돼 있어 편리했다.

◇ 드디어 말끔해진 로시를 찾아오다

3일만에 도미니크 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걷고... 패트롤헤드스에 로시를 데리러 다녀왔다.

저번에 택시 타고 돌아올 때는 30분도 안 걸렸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했더니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해 2시간이나 걸렸다. 90분 동안 버스와 지하철, 트램을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이 7즈워티(약 2천원)다. 어쨌거나 드디어 로시가 돌아왔다!

먼저 패트롤헤드스의 미치아이, 도미니크 씨에게 감사를. 정말 저렴한 비용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가장 큰 문제였던 부러진 프론트 패널 캐리어와 모터가 타버린 냉각팬을 교체했다.

프론트 패널 캐리어는 쉽게 부품을 구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여러 곳 수소문했나보다. 정품은 아니지만 시그널 램프와 안개등도 다시 달았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앞뒤 브레이크 오일도 교환했고, 엉망이었던 에어필터까지 새것으로. 부러진 카울은 당장 주행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돌아가서 고치기로. 새로 바꾸기엔 비용이 너무 비싸다.

 

로시를 받던 날, 미치아이(왼쪽)와 도미니크 씨가 떠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로시를 받던 날, 미치아이(왼쪽)와 도미니크 씨가 떠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세차까지 해서 오랜만에 말끔해진 로시를 보니 기분이 좋다.

내일 폴란드의 옛 수도였던 크라쿠프로 간다 하니 도미니크 씨가 중간에 스칼라 성에 들렀다 가라고 추천했다. 절벽 위에 성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멋진 여행하라며 작별 인사를.

그래서 내일 첫 번째 경유지는 스칼라 성으로 잡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내일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정리했다. 미리 빨래도 해놓고. 미리 챙겨놓지 않으면 아침나절이 금방 지난다. 낮엔 워낙 더워서 가능하면 시원한 아침에 출발하는 편이 낫다.

그 당시 바르샤바 기온은 33도. 더워서 잠깐 팔을 걷고 달렸는데도 피부가 화끈거릴 정도로 탔다. 바르샤바의 마지막 밤이다.    /조경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