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의 단편집 ‘무녀도’.

인간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을 어떤 언어로 포획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어쩌면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때로는 그에게 딱 맞는 그가 자신을 부르고자 하는 이름으로 그를 불러주지만, 때로는 싫어하는 이름을 강압적으로 붙이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가 붙인 이름은 그의 정신과 신체를 옭아매는 구속이 되고, 혐오의 언어가 된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이 ‘아시아’라는 신비에 싸여 있는 공간을 보고 싶은 대로 바라보고(혹은 바라보지 않고) 붙였던 이름은 오랜 기간 동안 아시아를 비롯한 비유럽의 공간들을 탐험과 모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탐험의 대상으로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의 열망은 그렇게 언어와 매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명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서구 문학사의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동방을 향한 모험이나 여행기들 속에 담겨 있는 진귀한 동양의 이야기들의 편린들은 바로 그 명명의 역사를 증언한다.

지금은 보편적인 모험 이야기로만 생각되는 대니얼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1719)’는 당시의 유럽인들이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표상하는가 하는 것을 낱낱이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자신과 똑같이 숨 쉬고 움직이고 있는 한 자율적 인간에게 로빈슨 크루소가 붙인 ‘프라이데이(금요일)’라는 이름은 인간의 지식문명이 대상에게 보여주는 인식적 폭력,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대상을 신격화하는 언어나 악마화하는 언어, 모두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슷한 뿌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김동리(1913~1995)의 ‘무녀도(1939)’, 그리고 나이지리아 작가인 치누아 아체베(1930~2013)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는 식민지를 겪었던 국가의 비슷한 시기, 비슷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이 두 편의 작품은 제국주의적 폭력 속에 자기의 이름을 잃은 ‘프라이데이’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어떻게 패배해갔는가 하는 것에 대해 기록한다.

‘무녀도’의 무당 모화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이보족의 오콩고는 모두 서구로 대표되는 외부 세계의 문화적 식민지화 속에서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자신이 평생 지켜온 가치를 부정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치누아 아체베
치누아 아체베

물론, 그들은 단지 피해자는 아니다. 서구에 의해 식민지를 겪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낭만화하거나 합리화해주지는 않는다. 무당인 모화는 자신의 아들 욱이가 자신과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는 욱이가 소중하게 품고 있던 성경을 불태우고 욱이를 칼로 찌른다.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다’속 주인공인 오콩고의 아버지는 호칭이 없는 남자, 즉 부족 내에서는 ‘여자’라고 불리는 남자였고, 오콩고는 그런 그를 경멸하여 최선을 다하여 부족 내에서 성공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라져야 한다는 그 힘으로 살아온 그는 점점 사회에서 폭력을 용인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그의 아들 은워예는 그를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이후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이 두 작품을 단지 서구 열강의 문화적 침략에 저항하다 파멸해간 영웅들의 이야기로만 보는 것은 어쩌면 이 작품들을 읽는 올바른 독법은 아닐 것이다. 단지 ‘우리 것이 아름답다’는 막연한 긍정은 타인이 우리를 규정한 언어를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할 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아픈 것이라도 스스로 바라보고 자기 규정할 수 있는 언어, 바로 그것이리라.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