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객이면서 학자이기도 했던 시인 조지훈

한 나라의 문화는 전통 지향성과 새것 지향성이 서로 힘겨룸을 하면서 발전해 나간다고 할 수 있다. 옛 것에만 집착할 경우 그 문화는 고루해져서 결국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며, 새 것만 지향할 경우에는 그 문화가 정체성을 잃고 독자적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문학 역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전통 지향성과 새것 지향성의 힘겨룸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한국의 현대사는 새것 지향성이 문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압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광풍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문인들이 있었으니, 그 중의 대표적인 시인이 바로 조지훈(1920-1968)이다. 조지훈은 시인으로만 한정하기에는 그 쌓은 업적의 산이 매우 높다. 그는 시인이면서 논객이고, 동시에 지사이자 학자이다. 그가 여섯 권의 시집을 통해 남긴 그 완미한 시, 4.19나 5.16과 같은 역사의 격동기마다 토해낸 사자후(‘선비의 직언’, ‘지조론’ 등), ‘멋의 연구’와 같은 논문을 통해 구축한 한국학의 세계는 후대의 기림을 받을만한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새것 지향성이
문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압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광풍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문인들이 있었으니,
그 중의 대표적인 시인이
바로 조지훈이다.…

그러한 삶을 뒷받침한 것은 바로 조선 500년을 이어온 선비정신이다. 조지훈의 고향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주실이라고도 함)으로, 이곳은 한양 조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다. 그의 조상은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다가 쓰러진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이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지훈의 증조부인 조승기는 의병대장으로 항일활동을 하다가 한일합방 이후 자결한 순국지사이며, 조부 조인석도 학문과 덕망으로 추앙을 받은 한학자였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조지훈은 일제가 주도하는 신교육 대신 전통적인 유학을 주로 배우며 성장하였다. 어린 조지훈이 신교육을 받은 것은 영양보통학교에 잠시 다닌 것이 전부이다. 수백 년간 주실 마을을 채워온 올곧은 선비정신 속에서 조지훈은 정신의 뼈와 살을 형성한 것이다.

거기에 덧보태 조지훈은 한국의 정신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축인 불교에도 전문가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1941년 불교계 학교인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를 졸업하였고, 1941년 4월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외전강사로 입산하여 1년 여를 머물렀다. 이 당시 조지훈은 각종 경전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선(禪) 체험을 갖기도 했던 것이다. 수필 ‘돌의 미학’(1964)에서는 월정사에 가기 일 년 전에 일본 교토의 묘심사(妙心寺)에서 선(禪)에 든 적이 있다는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배경을 통해 조지훈의 독특한 미의 세계를 일찌감치 알아본 이가 바로 정지용이다. 정지용은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의 작품으로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키며 “詩에 있어서 깃과 죽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天成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니 詩壇에 하나 新古典을 紹介하며……뿌라보우”(‘詩選後’, 문장, 1940.2.)라는 추천사를 남겼다. 정지용은 조지훈의 문학이 지닌 ‘고전적 성격’을 예리하게 포착했으며, 그러한 개성이 우리 시단에 축복이 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실제로 조지훈의 시는 한국의 고유의상이나 한국불교의 전통 춤과 같은 제재뿐만 아니라 형태나 기법 역시도 전통적인 세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조지훈의 시에는 시조나 한시(漢詩)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는데, 이것은 그가 한시를 직접 번역하고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조지훈 전집에는 무려 36편의 번역 한시와 19편의 창작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조지훈을 일컬어 ‘동양적인 세계를 우리의 새로운 시사에 수립한 거장’(박목월), ‘현대를 살다간 이조적(李朝的) 사림의 마지막 인물’(박노준), ‘우리 민족의 크고도 섬세한 손’(오탁번), ‘보편적 인문주의자’(윤석성)라고 칭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조지훈이 자신이 나고 자란 경북을 주된 시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의 시세계 중에서 네 번째 시기에 해당하다. ‘조지훈 시선’(1956)과 ‘청록집 이후’(1968)의 후기에서 조지훈은 스스로 자신의 시세계를 여섯 단계로 나누었다. 그 각 단계는 ①서구적 감각의 화사와 퇴폐의 시(습작기와 문단 데뷔 직전의 동인지 시기), ②민족정서에 대한 애착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수의 시(‘문장’지 추천 시기), ③선미(禪味)와 관조의 시(오대산 월정사의 시기), ④방랑과 운수심성(雲水心性)의 자연 은둔시(해방 직전, 조선어학회 시대), ⑤인생 사랑과 미움에 대한 고요한 서정의 시(해방 전후의 시기), ⑥현실 참여 및 사회 비판시(사회적 변동의 시기)(오세영, ‘조지훈의 문학사적 위치’, 조지훈, 최승호 편, 새미, 2003, 45면)로 나뉘어진다.

이 중에서 경북이 문학적 대상이 된 때는 암흑기에 해당하는 일제 말기이다. 월정사에서 나온 조지훈은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사업을 돕다가 회원 전원이 검거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제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우리 민족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는 조선어학회를 가혹하게 다루었고, 조지훈은 간신히 검거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 무렵을, 조지훈은 ‘나의 역정’(고대문화, 1955.12.5.)에서 성지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다녀오거나 여러 곳을 방랑한 시기라고 회고하였다. 경주 순례와 낙향 중의 방랑시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芭蕉雨’, ‘落花 1’, ‘落花 2’, ‘靜夜 1’, ‘靜夜 2’, ‘枯木’, ‘落葉’, ‘玩花衫’, ‘鷄林哀唱’, ‘倚樓吹笛’, ‘北關行 1’, ‘北關行 2’, ‘送行 1’, ‘送行 2’, ‘밤길’ 등을 들 수 있다.

조지훈이 1942년 봄에 경주로 박목월을 방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둘의 만남은 이후 청록파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단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조지훈은 보름 정도 경주의 곳곳을 방문했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한 것이 바로 ‘鷄林哀唱’이다.

鷄林哀唱

임오년 이른봄 내 불현듯 徐羅伐이 그리워 飄然히 慶
州에 오니 복사꽃 대숲에 철아닌 봄눈이 뿌리는 四月일
네라. 보름 동안을 옛터에 두루 놀 제 鷄林에서 이 한
首를 얻으니 대개 麻衣太子의 魂으로 더불어 같은 韻을
밟음이라, 弔古傷今의 하염없는 歎息일진저!

1
보리이랑 우거진 골 구으는 조각돌에
서라벌 즈믄해의 水晶하늘이 걸리었다

무너진 石塔우에 흰구름이 걸리었다
새소리 바람소리도 찬돌에 감기었다

잔띄우던 구비물에 떨어지는 복사꽃잎
玉笛소리 끊인골에 흐느끼는 저풀피리

비가오나 눈이오나 瞻星臺 위에 서서
하늘을 우러르는 나의 넋이여!

2
사람가고 臺는 비어 봄풀만 푸르른데
풀밭 속 주추조차 비바람에 스러졌다

돌도 가는구나 구름과 같으온가
사람도 가는구나 풀잎과 같으온가

저녁놀 곱게 타는 이 들녘에
끊쳤다 이어지는 여울물 소리

무성한 찔레숲에 피를 흘리며
울어라 울어라 새여 내설움에 울어라 새여!

계림은 경주의 옛 이름이다. 시인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의 혼으로 이 시를 쓰고 있다. 마의태자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로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통곡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시인 역시 마의태자와 같은 망국민으로서 그 찬란한 신라의 유적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과 서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경주를 노래한 시 중에 조지훈의 ‘계림애창’ 만큼 애상적인 시는 드물 것이다.

이 무렵에 발표된 15편의 시에는 슬픔과 상실감과 좌절의 정서가 가득하다. 특히 그것은 떨어지는 꽃이나 잎의 이미지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낙화), “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완화삼), “하나 둘 굴르는/落葉을 따라”(낙엽), “꽃 지는 소리/하도 가늘어”(낙화 2), “소리 없이 떨어지는/은행 잎/하나”(정야 1), “한두 개 남았던 은행잎도 간밤에 다 떨리고”(정야 2), “기울은 울타리에 호박꽃이 떨어진다”(북관행 1), “자욱히 꽃잎이 흩날리노라”(송행 1)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꽃이나 잎은 생명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꽃이나 잎이 떨어지고 죽어가는 상황은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져가던 일제 말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한다.

또한 “달빛 아래 고요히/흔들리며 가노니……”(완화삼), “이 밤을 어디메서/쉬리라던고”(파초우), “나그네는 홀로 가고/별이 새로 돋는다”(고목), “산골 주막방 이미 불을 끈 지 오랜 방에서”(정야 2) 등에 나타나는 정처 없는 방랑자의 이미지 역시 조국과 자연을 상실한 식민지인의 자기 표상에 해당한다. 어떤 경우에는 망국민의 슬픔을 “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낙화)라고 직접적으로 표출하거나, “산새가 구슬피/우름 운다”(완화삼), “鶴이 운다/사슴도 운다”(의루취적), “산길 七十里를 뻐꾸기가 우짖는다”(북관행 2)처럼 주변의 동물에 의탁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조지훈의 경주 순례와 낙향 중의 방랑시편은 누구보다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했던 시인이, 일제 말기에 경험한 그 참담한 아픔을 고전적인 미적 기율에 바탕해 표현한 우리 현대시의 소중한 얼굴이다.
 

작가 조지훈은…

1920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탁(東卓). 어린 시절엔 한학을 익혔고, 중학교 과정을 독학했다. 혜화전문학교 졸업 후 ‘문장(文章)’을 통해 등단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한 우아하고 섬세한 시로 유명하다. 경기여고와 고려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0년대 후반엔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